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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현 Jan 12. 2024

후기 인상주의

인상주의 이후의 재해석들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7월의 편지.


후기인상주의 혹은 탈인상주의

는 기존의 아카데미 미술을 부정하고 나와, 미술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던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다시 한번 미술계의 새로운 변화를 주었던 미술사조입니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후기인상주의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인상주의에서 자극을 받아서 태어난 새로운 흐름을 말하는 것이기에 실질적으로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는 공통점이 작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등의 후기인상주의 작가들은 각자 공통점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습니다. 특히, 고흐는 분류에 따라 이후에 등장할 표현주의의 원조로 간주되어 표현주의의 거장으로 소개되기도 하는 등 독자적인 화풍을 가지고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네덜란드의 화가, 고흐의 삶은 비극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패한 선교사에서 화가로, 다시 생전에 1장 밖에 팔지 못한 안타까운 화가가 되었지요. 고흐는 자신의 이런 우울한 나날에도, 생레미의 병원에서 요양을 하던 여러 비극 속에서도 붓을 놓지않고 자신의 열정을 쏟아내었습니다.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내 생활비보다 높이 평가되는 날이 올 것이다.


고흐가 남긴 말입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조로써 하던 말이었을까요? 고흐는 생활비와 화구 비용을 동생, 테오로부터 얻어서 살아갔습니다. 고흐는 테오에게 많은 편지를 써왔고, 그 편지들은 기록으로 남게되었지요.


가족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고흐를 응원해준 동생, 테오는 고흐의 그림을 팔아주고자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도 않았지요.


벨기에, 뇌넨, 파리 등 각지를 머물면다가 고흐의 여정은 아를이란 장소에 이릅니다.

고흐의 여정지. 파리(위에서 두번째)에서 아를(가장 아래)로, 다시 생레미(아를의 바로 위)로 이르는 여정이다.

아를에서 고흐는 화가들의 모임을 꿈꾸며 여러 화가들을 초청합니다만, 응한 사람은 고갱 한사람 뿐이었습니다.


고갱과 아를에서 그림을 그리며 친해지기도 합니다만, 성향이 다른 두 화가가 같이 뜻을 함께하기는 힘들었지요. 개성이 강한 두 사람은 금방 그림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로 서로 갈라지고 맙니다.


고흐가 귀의 일부를 잘라냈다는 이야기는 아를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일들을 겪은 고흐는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되는데요, 여러 곳 중에서 생레미의 요양원을 가게됩니다.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생레미.

고흐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별이 빛나는 밤>은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동안에 그린 작품입니다.


고흐가 그림을 자신의 눈에 보이는 풍경만을 담는 것이 아닌, 자신의 눈을 넘어선 깊은 마음 속의 고동을 모두 담아내고자 한 시도가 보이는데요.


이런 화풍을 보고 분류에 따라 고흐가 표현주의로 분류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고흐는 이미 죽음에 대해 생각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평가들도 생겨납니다.


이미 테오에게 많은 신세를 져버리고 비관과 불안에 빠져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것이 보여지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빈센트 반 고흐, 1890년 오베르.

고흐는 생레미에서 나와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으로 가셰 박사를 추천받습니다. 고흐는 생레미를 나와 오베르로 향하게 됩니다.


<가셰박사의 초상> 빈센트 반 고흐, 1890년.

가셰박사는 폴 세잔, 에두아르 마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등의 인상주의의 유명한 화가들을 만나본 예술에 관심을 가진 의사였습니다.


가셰박사는 예술을 사랑한만큼 고흐는 가셰박사에게 그림을 그려서 주기도 하며 가셰박사도 고흐의 그림을 높이 평가해 주었지요.


그러나 가셰의 도움에도 고흐는 심리적인 안정과 위안을 얻지 못합니다.


끝내 빈센트 반 고흐는 1890년 7월 27일, 권총자살을 시도합니다. 당장 총상으로 죽은 것은 아니지만, 총상 이후의 잇따른 합병증으로 1890년 7월 29일에 사망합니다. 


고흐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관을 그림 속에 담아내고자 했으며, 고흐의 비극적인 삶을 본다면 작가의 삶이 어떻게 이어져왔는지가 작품과 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흐부터 이제 예술은 작가의 주관과 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작품을 볼때, 화폭의 그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담고있는 작가의 삶, 생각, 의도, 감정을 종합적으로 보고 평가할 필요성이 크게 늘었던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당시 유럽은 어땠을까요?


19세기 말은 대전쟁을 예고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전편에서 언급된 제국주의의 선두주자 영국은 어땠을까요? 영국은 지구상 육지의 1/4를 차지했습니다. 당연히 그 영광은 절정이었겠지요?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1870년대엔 새로운 산업이 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영국은 증기기관과 방직산업으로 산업혁명의 시작을 알렸습니다만, 결국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침체되었습니다.


당시의 새로운 산업은 전기, 화학, 내연기관 등이었지요.

다음 표를 볼까요?


Germany's estimated contribution to the dyestuffs industry


1878 : 70 (World) 44 (Germany) 62.86 (Percentage of total)

1883 : 92 (World) 60 (Germany) 65.22 (Percentage of total)

출처 : The Industrialization of Invention: A Case Study from the German Chemical Industry, Georg Meyer-Thurow Vol. 73, No. 3 (Sep., 1982), pp. 363-381 (19 pages) JSTOR


당시 독일이 점유한 염료산업의 비중치입니다. 1871년 통일된 독일은 불과 몇년안에 전 세계 화학물질 산업의 6할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석탄 생산량은 독일과 영국은 이미 대등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철강은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임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할수 있습니다. 강철 생산량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경 같은해의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철강생산을 합친 것 이상으로 독일 한 국가에서 생산되었습니다.


영국이 이렇게까지 추락한 것은 영국의 무리한 확장 정책의 영향이었지요.

영국은 2국 표준주의라는 해군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2국 표준주의는 세계 2위, 3위의 해군전력을 갖춘 나라 둘을 합한 것 이상의 전투력을 유지할 것이라는 정책이었지요.


압도적인 1등을 유지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시대가 바뀌어 신산업이 등장하던 영국의 침체기에도 변함이 없어, 전세계에 걸친 해가 지지않는 영국을 유지하기 위해 해군을 무리하게 증강시키고 있었지요.


이미 세상은 바뀌어, 미국, 독일, 일본이라는 신흥 열강이 각자 해군을 양성하고 전세계에 힘을 과시하고 있던 시기임에도 영국의 집착은 변하지 않았지요.


영국이 침체할 동안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독일과 미국은 영국의 입지를 위협했지요.


그럴수록 영국은 자신들이 가진 지구상 육지의 1/4 이라는 광할한 식민지를 자신들이 더더욱 움켜쥐어야 한다고 여겨 독일과 미국에게 무역보복으로 영국의 의사를 답했지요.


두번의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영국의 편을 들었지만, 사실 세계대전 기간에도 미국은 참전을 주저하다가 급격한 정세변동(1차 세계대전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2차 세계대전 일본의 진주만 공습 등)으로 억지로 참전한 경우지요. 그래서 세계대전 이전에 미국은 사실 영국을 조심했답니다.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 제위기간 : 1888년~1918년

영국이 각국을 견제하는 동안 독일은 영국의 조치에 반발하여 더더욱 영국을 자극하게 되었습니다.


미해군에서 연구하던 '해군력이 미치는 역사적 영향력' 이란 주제에 대해 독일은 해군을 양성하는 것이 생존의 길이라고 여겨서 1차 세계대전 발발 시점까지 5차례에 걸친 함대법 제정을 통해 해군양성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당시 독일을 통치하던 빌헬름 2세는 독일이 영국을 이기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였고, 국력의 팽창을 그 답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쇠락해가던 영국과 떠오르는 신흥세력 독일의 대결은 19세기 후반에 이미 가시화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이라고 불리던 최초의 총력전, 1차 세계대전은 미술뿐만 아니라 전세계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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