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세현 Jan 05. 2024

인상주의

빛과 색으로 보는 인상

인상주의

는 감성의 영역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빛과 함께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을 담았던 인상주의는 기존의 아카데미 미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파벌로서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드러내고 관객으로 하여금 감성을 동요시키는 인상주의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에두아르 마네(1832~1883)

마네는 법관의 아들로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난 마네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미술을 지망하였습니다.


마네는 고전회화와 아카데미 미술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했습니다. 마네는 인상주의의 선구자이고 인상파 그룹의 창립에 영향을 줍니다.


그는 자신의 그림들을 여러 차례 살롱에 출품하지만 낙선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낙선한 그림에도 관심을 두어, 낙선전을 따로 열게 됩니다.


<풀밭 위의 점심식>, <올랭피아> 등은 이때 공개되었습니다. 당시에 두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에는 큰 반발을 샀습니다.


왜 그렇게 두 작품이 화제가 되었을까요?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264 x 208 cm 1863년

나체의 여성과 정장을 차려 입은 신사들이 나오는 해당 작품은 당시 신사들로 일컬어지는 부유한 사람들의 위선이 담겨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관객을 빤히 쳐다보는 그림 속의 여인은 매우 도발적이고 미술을 향유하는 신사들에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전통적인 그림의 양식을 벗어나고자 한 시도였습니다.


<올랭피아>와 마찬가지로 그림 속 도발적인 나채의 여인이 신화 속 여신이 아니었던 것이 문제였지요.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91cm × 130cm 1863년

<풀밭 위의 점심식사>나 <올랭피아>는 나채의 여성이 매춘부를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역사나 신화 속의 여인을 숭고하게 그리던 아카데미의 고전파 작품들에 비교하면 파격적인 시도였던 것이지요.


올랭피아라는 이름은 매춘부들의 가명으로 자주 쓰였다고 하는데요, 당시의 도덕관념으로는 숭고해야 할 미술이 사람들의 욕망을 나타내고 천박한 소재를 쓴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네는 아카데미의 고전파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자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게 되어 인상주의의 대표격이 됩니다.


개인의 주관을 드러내고 빛의 활용이 주가 되어 감성을 동요시키는 인상주의는 클로드 모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 등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63 x 48 cm 1872년

인상 해돋이는 붓놀림과 표현방식에 있어서 정교함을 발휘해서 만들어낸 [리얼함]과는 거리가 있는, 투박한 묘사로 그려졌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적이라고 느낄 소지가 있습니다. 일출의 [인상]을 잘 표현했기 때문에 우리의 감성은 해당 작품을 일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두 자매> 100.5 X 81 cm 1881년

빨강, 파랑, 초록 등의 원색을 기막히게 표현해낸 색채의 화가, 르누아르.


그는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손을 쓰기 힘들어졌을 때에도 붓을 놓지 않고 작품을 꾸준히 작업했습니다.


또렷한 선을 남기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화사하게 묘사한 르누아르의 그림은 관객으로 하여금 편안한 인상을 남기게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사실주의를 보면서 인상주의자들은 개인의 감성을 반영하기보단 현실을 담고자 하는 사실주의를 비판하였지요.


드가, 르누아르, 모네 등이 몸담은 인상주의는 근대에서 현대미술로 나아가는 초석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어땠을까요? 당시의 사회는 매일 매일이 새로운 기술 혁신들이 나오던 화려한 시대였습니다.[1] 그 이면에는 각국의 팽창주의 정책 즉, 제국주의[2]가 세계 각지를 침탈하는 일이 벌어졌지요.



[1]엑스포

영국 런던의 수정궁. 1936년 화재로 인해 소실.

만국박람회라고도 불리는 엑스포는 세계각국이 문물을 전시하고 선보이는 국제 전시입니다.


빠르게 기술이 발전하던 산업화 시기, 각국이 자국의 우수한 기술을 선전하기 위해서 박람회에 출품을 하였습니다.


1851년 런던 엑스포를 시작으로 증기기관, 엘리베이 전화기 등이 차례로 공개되면서 세상이 발전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런던 다음으로 열린 파리 엑스포부터는 예술품의 참여도 허용하면서 점점 엑스포의 위상은 높아져 갔습니다. 한국의 경우, 1889년 에펠탑이 공개된 파리 엑스포에 처음 출전을 했지요.


현재까지도 엑스포는 중요한 국제 행사로서 각국이 엑스포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지요.



[2]제국주의

우리가 세계를 더 정복할수록 인류에게는 더욱 이득이다. - 세실 로즈
로도스의 거상. 남아공과 이집트를 잇는 영국의 식민지 정책을 나타낸다.

제국주의는 강한 경제, 군사적 역량을 갖춘 나라가 광범위한 지역에 세력을 투사하여 지배력을 확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국의 세실 로즈(1853~1902) 라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주장한 정책입니다. 


당시 유럽은 전편에서 소개 된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대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빈부격차와 갈등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거기에 상품의 대량생산으로 각국은 더욱 많은 상품을 소비할 시장을 찾고, 원자재를 타국보다 먼저 점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지리적으로도 각지에 거점을 만들어 군사적, 외교적인 이득을 보기 위해서 제국주의를 행하기도 합니다.


인도가 바로 상품 시장이자 원자재를 찾기 위한 식민지로 꼽히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한국의 경우는 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을 인정받고자 한 일본의 개입이었지요. 원자재를 노릴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러시아와 중국을 전쟁으로 격파하고 아시아의 대표자로 등극하기 위한 거점이 한국이었지요.


이러한 팽창정책은 각국이 더 이상 육지에 강대국들이 개입하지 않은 영역이 없어질 때까지 이어집니다.


식민지가 항상 이익을 주던 것은 아닙니다. 군사 주둔 비용이나 개척비용을 고려하면 때로는 손해를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경쟁국이 그 지역을 선점했을 경우의 발생할 상대적 손실을 두려워 해 각국은 지구의 육지가 모두 점유될 때까지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식민지는 지배국에게 항상 이득만을 주는 존재가 아니었지만 각국의 자존심 때문에 피지배국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버렸습니다. 지배국들은 서로 자존심을 이유로 국운을 건 투쟁에 뛰어들고 말지요.


이 투쟁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 하도록 합시다.

이전 04화 사실주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