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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현 Dec 29. 2023

사실주의

현실을 담아내다

난 천사를 본 적이 없다. 나에게 천사를 데려와라.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
- 귀스타브 쿠르베


사실주의

는 리얼리즘으로도 불리는 현실의 기록을 꾸밈없이 반영해야 한다는 철학으로 탄생한 미술 사조입니다. 낭만주의의 주관적이고 격동적인 표현에 반대하여 신화, 환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속의 풍경이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속에 담았습니다.


사실주의가 탄생한 시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미 1830년대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사진기가 탄생한 시점이지요. 그러면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의미없다고 생각될 수 있겠지요. 당시에도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답니다.

그러나 당시엔 사진기가 가진 한계가 있었는데요, 렌즈를 통해 초점을 잡기 까지 오랜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진 한장을 찍기위해 수십분을 가만히 있는 것은 엄청난 고생이었지요.


풍경을 찍을 때에는 움직이는 물체. 사람, 동물 등은 찍히지 않고 가만히 있는 풍경만이 사진에 남아버렸지요.카메라의 한계로 인해서 진짜 바쁜 일상은 그림으로 남겨야 했지요. 


더군다나 사진은 사진만의 감동이, 그림은 그림만의 감동이 있기 때문에 사진이 있다고 해서 그림이 쓸모 없다는 평가는 옳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주의에서 말하는 사실은 어떤 의미일까요?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정리를 해볼까요?


겉으로 보기에 사실적이라고 느껴지는 그림일까요? 아니면 현실을 반영한 그림일까요? 둘다 아니라면... 어디서 자리를 깔아두고 현장에서 그려야 할까요? 많은 작가들이 고민해온 문제입니다.


19세기의 사실주의 작가들은 현실을 반영한 그림으로써 접근했습니다.


겉으로 사실적이다 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뿔달린 말, 유니콘을 그릴때 털의 묘사며 눈동자에 맺힌 눈물과 빛 등 자연적인 모습을 완벽히 갖추어서 그렸다고 합시다. 정말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유니콘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니콘이 실존하는 동물일까요? 그렇지 않지요. 유니콘은 상상의 동물입니다.


현실을 반영한 그림은 어떨까요?

귀스타브 쿠르베 <돌깨는 사람>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린 <돌깨는 사람> 이라는 작품입니다. 해당 그림은 채석장 노동자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두 눈으로 직접 채석장에 찾아가서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모델을 이용해서 자세를 잡게 해서 인위적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그럼에도 사실주의에 해당되는 이유는 이 그림을 볼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처우를 잘 표현했기 때문이지요.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그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시간, 공간적 제약은 물론이고 그림으로써의 구도나 개체의 배치에 있어 제약이 생깁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줍는 여인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 입니다.


밀레의 작품은 이 그림 외에도 <만종> 과 같은 농부들의 삶을 그리는 작품들이 많지요.


이 그림 역시 농부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고 해서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 역시 실제 장면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모델을 이용해서 구도를 만든 후, 현실을 고려해서 묘사를 해낸 작품입니다.




사실주의에서도 개인이 각자 다르게 경험해오기 때문에 생기는 인식의 차이는 인정합니다. 상류층의 부유하고 화려한 삶도 없는 일은 아니니까요.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에 있을 수 있는 당위성을 납득시킨다면 어떤 주제든 사실적일 수 있습니다.


각자가 인지하는 현실을 그린다는 점, 그 현실이 개연성 있는 모습을 담을 것을 강조한다는 점 등으로 사실주의는 현실주의라고 이해하시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아돌프 폰 멘젤 <제철소>

당시의 노동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위 그림의 우측 하단을 보면 공장에서 짧은 쉬는 시간 동안 식사를 하고 있다. 바닥은 어질러져 있으며 비위생적이다. 쇳덩이를 다루는 노동자들을 보면 안전장비 없이 맨몸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주의는 미술사조적으로 그 계보가 현대까지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상상의 존재를 배격하고 현실을 반영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역시 현실과의 비교를 통한 공감 그 이상의 감동을 주기에는 불리한 점이 지적되었거든요. 


현대의 극사실주의는 개체의 묘사를 극한으로 끌어올려서, 움직이지 않는 미술품이지만 생생한 느낌을 준다는 감상이 주된 목적입니다. 19세기의 사실주의와는 다른 목적을 지닌 사조이기 때문에 둘의 연관성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보시는게 좋습니다.


그러면, 현실 속의 사정을 반영해서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우리는 사진이나 영상을 찍을 때에도 구도를 신경씁니다.


소실점은 실제로는 평행인 선들이 투시 상 평행을 이루지 않을때 만나게 되는 점을 말한다. 해당 사진에는 정 가운데의 지점이 소실점에 해당한다.

사진이나 영상에서도 미술적 요소인 소실점, 투시 등이 적용되지요. 


사진을 그림 같이 찍었다는 말은 칭찬이겠지요? 미술적인 요소들을 고려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을 유발하는 사진은 좋은 사진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을 사진같다고 하는 것도 칭찬이 될 것입니다.


이렇듯, 사진과 그림은 적이나 경쟁자가 아닌, 상호 협력의 관계입니다.


사실주의는 사진이 기술적으로 미숙할 때에,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세상에 이로울지를 제시한 길잡이 라고 할수 있겠지요. 당시의 현실을 담아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을 이끌어내고 불의를 고발하던 사실주의 미술은 현재, 사진과 영상매체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론, 다큐멘터리가 생생한 현실을 담아낸다는 그 정신은 사실주의와 공통점을 가지지요.


귀스타브 쿠르베가 살던 시기, 벨 에포크는 유럽에 번영을 가져왔지만 그 이면에는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노동자의 비참한 삶이 있었습니다.


동시기에 카를 마르크스[1]는 공산주의[2]라는 이념을 창시하여 노동자들의 해방을 이야기 했었지요.


쿠르베는 노동자들의 삶을 그림으로 그려왔습니다. 자연스럽게 쿠르베는 공산주의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북독일의 군사국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나폴레옹 3세는 퇴위합니다.



프랑스 제국이 무너지자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자 노동자들과 군부로 편을 나누어 대치하게 됩니다.


공산주의자들로 이루어진 파리 코뮌[3]과 공화주의자, 군부로 이루어진 프랑스 제3공화국 이었지요.


쿠르베는 파리 코뮌에 뛰어들어 의원을 합니다.


처음에는 파리코뮌이 우세를 가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공화정부는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4]에게 평화협정을 조기에 채결하여 포로들을 송환받고 재무장에 나섭니다.


재무장에 성공한 프랑스 공화정부는 파리 코뮌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파리 코뮌은 해산됩니다. 쿠르베는 이때, 스위스로 망명을 갑니다.


[1]카를 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 프로이센의 라인란트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철학을 공부하여 마르크스는 예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이후 라인신문의 편집장이 된 마르크스는 자유주의적인 신문들을 출간하지만 프로이센 정부의 검열로 인해 번번히 기사가 삭제당했고, 결국엔 라인신문은 폐간 되고 맙니다.


여기에 실망한 마르크스는 프랑스로 망명을 갑니다. 그러나 프로이센 국왕 시해 선동을 이유로 프로이센의 항의를 받으면서 프랑스에서도 추방을 당합니다.


결국 마르크스는 벨기에로 갑니다.


공산주의의 아버지가 되기 이전부터 마르크스는 언제나 계급의 해방과 자유로운 삶을 바랐습니다. 벨기에에서 사는 동안 마르크스는 해방을 선동하고 여러 선언문을 발표해왔는데, 1848년에 세상의 비참한 현실을 보던 마르크스는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있는 처지의 노동자들을 보며 공산당 선언을 발표합니다.


1848년은 지난화에 언급되었듯, 전 유럽이 혁명으로 불타오르던 해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공산당 선언은 노동자 계급의 의식을 깨우쳤으며 돌이킬 수 없는 사회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이,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비밀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 동맹을 맺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사슬 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모두 공산당 선언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지만 1848년의 혁명은 실패하고 말았고, 마르크스는 다시 영국으로 망명갑니다. 이후에도 저술 활동을 하다가 마르크스는 1883년 숨을 거둡니다.


[2]공산주의

공산주의의 낫과 망치

공산주의에서 사회는 갈등으로 발전하는 존재입니다. 그 갈등의 주체는 유산계급 부르주아지와 무산계급 프롤레타리아로 나뉩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구분하는 것은 생산수단의 소유의 여부입니다.


부르주아는 공장을 가지고 생산을 촉진합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노력을 가치 절하하여 잉여자본을 형성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유산계급은 부유해지고 무산계급은 착취당한다는 것이 긴장의 원인입니다.


결국 언젠가 이런 노동에 대한 가치절하는 사회적으로 모순을 불러일으켜 노동자의 혁명을 마주하게 되고 생산수단은 공동의 소유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 공산주의 입니다.


사실 사유재산 그 자체를 철폐하기 보단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개념에 가깝기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라는 말이 나온 셈이죠. 노동자 평의회가 생산물을 어디에 필요한지를 결정해서 사회 곳곳에 배분한다는 의미이지요.


[3]파리 코뮌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파리 코뮌

프랑스 제국의 몰락 이후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자는 파리에서 자체적으로 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여성참정권 보장, 노동시간 제한 등 당시로써는 매우 진보적인 정책을 주장했습니다.


파리코뮌은 얼마안가 진압되었지만 그 영향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후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비록 실패했을지언정 파리 코뮌의 시도를 매우 중요시하여 공산주의 운동의 반면교사가 되었습니다. 


국제적 사회주의 운동 인터네셔널의 분위기도 파리 코뮌에 이르러 매우 고조됩니다. 전세계 노동자들이 열광한 사건이었지요.


[4]오토 폰 비스마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수상입니다.


지난 화에서 언급한 1848년 혁명을 진압하는 것을 강경하게 주장하면서 수상이 되었습니다.


"작금의 문제들은 다수결 따위가 아닌, 철과 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이 말을 보고 몇몇 사람들이 그를 잔혹한 군국주의자로 알고 있지만 사실 비스마르크의 진가는 외교 입니다.


그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독일 통일을 가로막는 오스트리아 제국, 프랑스 제국을 격파하기 위해서만 무력을 동원했습니다.


그는 영국과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며 중립을 약속받았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오스트리아를 파괴하는 대신,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으로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독일의 통일을 자발적으로 승인하도록 했습니다.


사방에 있는 모든 나라들에게 프로이센이 위협이 아니며 독일의 통일은 유럽의 평화를 깨는 일이 아니라고 설득했습니다.


1866년경 프로이센 왕국

이후 프랑스 제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나폴레옹 3세의 야망을 이용하여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 하도록 유도하는 묘수를 썼습니다.


프로이센은 여러 인물들이 비슷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로이센은 대포알에서 태어난 국가이다." 라고, 볼테르는 "국가는 군대를 가진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군대가 국가를 가진다." 라고 평가를 내렸습니다.


군사국가 프로이센은 프랑스를 가볍게 격파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의 통일을 선포합니다.


이로써 독일제국(1871~1918)이 탄생합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독일제국 선포. 가운대에 흰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마르크이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을 통일시킨 업적을 남기고 1898년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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