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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현 Dec 22. 2023

낭만주의

불타는 감성을 그려내다

"예술가는 자신 앞에 직면한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것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낭만주의

는 신고전주의에서 다시 반발하여 나온 감성을 다루는 사조입니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적인 규범들, 이상화 등을 배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더 이상 이상을 추구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피곤해졌던 걸까요... 이들은 역동적인 모습, 이국적인 모습들과 자연풍경 등을 그렸습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웅장한 자연과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인상적인 그림입니다. 위의 어록을 남긴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으로, 프리드리히의 이야기 대로 자신과 자연이 어떤 관계인지 나타내는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신고전주의가 세상을 규범적, 이성적으로 정의내릴수 있는 것으로 진단하였다면 낭만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 본 것이 신고전주의와의 차이점입니다.


낭만주의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감성, 개성 그리고 상상력으로 표출하며 강렬한 색채와 명암의 대비를 이용하여 강렬하게, 아름다움 뿐만아니라 추함까지도 그려냈습니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절망과 함께 구조될 수 있다는 희망이 교차하는 프랑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의 그림입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사람의 탑이 삼각형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지쳐 쓰러진 사람들을 삼각형의 바닥에 두며 구조의 희망을 둔 사람들을 제일 위의 꼭지점에 배치하였습니다.


평면적 전개를 깨버리고 활력을 그림에 부여한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낭만주의는 이전 시대의 이상화를 부정하며 감성의 영역을 자극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며 공장의 기계는 나날이 바쁘게 가동되던 시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혁명의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유럽의 질서가 빈 체제로[1]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 아래 다시 짜여졌습니다. 왕들은 시계를 프랑스 대혁명 이전으로 돌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편에서 이야기 했듯이 세상은 산업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빈 체제가 당장의 평화는 가져왔지만 또 다른 사회 변동과 혁명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가져다 준 자유 평등 박애와 민족주의... 수많은 사상들이 이미 민중의 마음 속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1848년[2]에는 그러한 개혁의 열망이 터져나오게 되지요.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꽃핀 사회 문화적 현상들, 이전의 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풍요와 화려한 기술의 발전은 그 모든 번영이 1차 세계대전으로 끝날 때까지 "벨 에포크"[3] 라고 불리게 됩니다.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

전함 테메레르는 이전시대의 전열함으로, 증기선이 등장하던 당시에 더이상 활약할 수 없게 되어 증기선에 견인되며 퇴역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 시대의 영광이 증기선에 의해 끌려가는 시대의 변화를 담아낸 이 작품은 당시의 급변하는 사회에서 낭만을 찾고자 한 그림사조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테메레르호의 색을 하얗게 한 것은 구 시대의 전함에 대한 경외라고 할 수 있지요.







[1]빈 체제

회의장은 춤춘다. - 빈 회의를 가리키며.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열린 빈 회의 이후 결정된 유럽의 국제질서를 빈 체제라고 부릅니다.


회의의 목표는 혁명의 이전 체제로 유럽을 복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혁명으로 인해 끌어내려진 군주들을 복위시키고 유럽의 세력 균형을 맞추어 평화와 안정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회의에서 눈여겨볼 점은 프랑스를 패전국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바섬을 탈출한 뒤 기회를 노린 나폴레옹과의 전쟁 역시 혁명의 사상을 전파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개인에 대한 선전포고였지 프랑스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메테르니히에게 있어서는 프랑스의 혁명을 잠재우고 유럽의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프랑스를 패전국으로 대하는 것은 명분에도 맞지 않으며 보복심을 불러일으켜 또다른 전쟁의 위험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러면 빈 체제는 성공적이었을까요?


결국 시대의 흐름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프랑스는 다시 혁명을 반복하여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으로 이어지며 왕정이 무너집니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7월 혁명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프랑스에서의 일련의 혁명들을 거치며 전통으로의 복귀를 노린 빈 체제는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유럽의 질서를 정리했고 국제관계와 힘의 균형을 이루어 장기간의 평화상태를 구축한 점 등으로 국제정치학, 외교학에서 깊이 참고할 예시를 만들었던 점에서 빈 회의의 성과를 높이 평가할 수도 있지만,


혁명을 분쇄하고 민중의 의식이 깨어나는 것을 막고자 한 회의인 만큼 부정적인 평가 역시 공존합니다.



[2]1848년 혁명

빈체제에서 짓밟힌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진영은 빈체제의 출범 이후로 계속 조용히 있었습니다만, 시대착오적인 빈 체제는 그 인내심을 자극했습니다. 1848년, 그 인내심은 한계에 이르러서 유럽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인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1840년대의 유럽. 출처: https://www.reddit.com/r/europe/comments/cf7r14/map_of_europe_1840/

프랑스에서 1848년 2월에 혁명으로 오를레앙 왕조 루이필리프 1세가 퇴위하고 공화정이 들어섭니다. 


독일 지역에서는 3월, 전 지역에서 혁명이 일어납니다. 아직 통일되어 있지 않는 독일의 각국에서 그 혁명이 여러 양상으로 진행됩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빈 체제의 주인공 메테르니히가 영국으로 망명가게 되었습니다. 작센, 바이에른 같은 여러 독일지역의 국가들에서도 시민혁명이 발생했으며 특히, 프로이센에서는 의회의 수립과 독일 민족 통합을 내걸은 혁명파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압박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베네치아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며 양시칠리아 왕국과 교황령 등에서 혁명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사르데냐 피에몬테 왕국이 유력한 통일의 주도자로 부상하며 이후에 벌어질 통일전쟁을 이끕니다.


그 외에도 타국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 헝가리 등의 지역에서도 독립의 요구가 발생합니다. 영국과 러시아 만이 혁명을 피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48년의 혁명들은 유럽의 체제에 엄청난 변화를 주긴 했지만, 혁명 자체로는 모두 실패합니다.


프랑스에서 2월 혁명으로 들어선 공화국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아직 나폴레옹을 그리워한 사람들은 보나파르티즘이라고 불리는 정치운동으로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킵니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얼마안가 친위쿠데타를 통해 기존 헌법을 폐기하고 황제로 등극합니다. 


독일지역에서는 시민들의 혁명이 간단히 진압되고 맙니다. 북독일의 강국 프로이센에서는 그 전개가 복잡했는데요, 혁명파는 수도 베를린을 점거하여 국왕으로부터 의회제를 약속받았고 거기에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구체제의 상징인 왕권 신수설에 기반한 왕정이 아닌 독일인의 황제가 되어달라는 청원을 합니다. 다만, 베를린에서 떨어진 동프로이센(현 칼라닌그라드)에서 보수파들이 군대를 일으켜 베를린으로 진격합니다. 보수파의 군대는 혁명파를 진압했고 의회는 융커라는 프로이센 귀족들이 차지해버렸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독일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거절합니다.


이탈리아는 아직 통일을 논의하기에는 지역들간의 분열이 심했기에 미뤄집니다.


폴란드는 러시아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인해 독립을 못했습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의 타협으로 독립이 아닌 정치적 권리를 약속받는 식으로 오스트리아와 연합하여 오스트리아 - 헝가리 이중제국으로 거듭납니다. 결국 국민국가 헝가리의 꿈은 옅어졌습니다.


결국, 일부분의 타협만을 약속받고선 혁명이 바라던 이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30년이라는 시간을 더 기다려 본다면 본격적인 사회변혁이 다시 시작되니 아무 의미 없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3]벨 에포크

벨 에포크는 19세기의 유럽의 번영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이르는 1세기 동안 유럽에서는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모든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싸우는 그러한 총력전은 발발하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삶을 영원히 바꿀 변혁은 밤을 환하게 만들어 잠들지 않는 도시들을 탄생시켰으며, 높게 솟은 건물들은 거주지역의 한계를 끝없이 늘려주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달라지고 이전의 그 어느 시대에도 볼 수 없는 풍요와 윤택함이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이전의 농업사회에서는 흉작이 들면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지며 잘되더라도 인구가 늘면 그만큼 먹어치웠기에 질적인 발전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질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지요. 옷은 손으로 한땀 한땀 만드는 것이 아닌, 공장에서 금방 천을 만드는 식으로 입게 되었죠. 기계로 만들었기에 품질도 좋으면서 일정하게 나왔지요.



낭만주의는 세상이 복잡해지고 피곤해지는 만큼 더더욱 감성에 이끌려 낭만의 세계를 그려왔지요.


세상 그 자체에 대한 평가는 담겨있지 않지만, 낭만주의는 그 시대의 격변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시대에 아름다움만이 있는게 말이 될까요? 세상은 다시 불안 속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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