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인 명암으로 연출하다
은 역동성과 빛의 대비를 근원으로 합니다. 바로크의 시작을 알려면 우선 이전 시대의 르네상스와 마니에리스모를 알아야겠지요.
르네상스는 비례, 균형,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고전에 대한 동경과 인간이 지향해야 할 이상향의 탐구가 주제가 되었지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다 빈치 등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마니에리스모(mannerism)는 르네상스의 비례, 균형, 조화에서 벗어나 인위적 왜곡과 부조화를 미술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언제나 항상 이상향을 추구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죠. 마니에리스모에서의 그림들은 구도 면에서도 수직, 수평이 아닌 언제 쓰러질지 모를 불안정한 대각선 구도를 따르며 고전에 대한 수정을 시도했습니다.
바로크는 르네상스와 마니에리스모를 거쳐 역동성을, 그 속에서 고전적 질서를 절충하여 등장했습니다.
바로크의 어원은 일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barroco, 스페인어 barrueco, 이탈리아어 barocco 등 다양합니다만 정확한 기원을 알 수 없습니다.
왜 일그러진 진주일까요? 그것은 고전적인 비례, 균형, 조화를 지향하는 바로크 문화에 부정적인 평가에 의해 이런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물론, 고전주의의 관점에 의한 평가이기에, 이후에 근대 미술의 중요한 흐름으로 복권되었습니다.
바로크 미술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프랑스에서 루이14세[1] 이후로 절대왕정[2]이 들어선 것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옛날에는 예술가들의 활동을 지원해줄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요? 바로 궁정의 왕과 귀족들입니다.
30년 전쟁[3]이 끝난 이후 유럽에서 교회는 더 이상 미술을 주도할 정도의 위신을 가지지 못했습니다.[4]
왼쪽 그림 속 이야기는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상처를 만져보는 도마를 그린 것입니다.
작품을 의뢰한 교회 측에서는 굉장히 당혹스러웠답니다.
예수님을 신성 보단 현실적으로, 인간적으로 그렸기에 받아들이기를 꺼려했습니다.
예술가들의 후원자는 왕과 귀족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들을 위해 그림을 그려 바쳐야 합니다. 그들은 어떤 그림을 남겼을까요?
극적인 명암법을 말합니다. 검은 커튼을 쳐 놓은 듯한 배경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어둠을 배경으로 등장물들은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집니다. 조명을 받는 듯한 연출은 사람들로 하여금 등장물들의 주름이며, 상처이며 구체적인 부분까지 집중하게 만듭니다.
바로크 회화에서 자주 쓰이는 명암법은 카라바조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디트는 적장의 목을 베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홀로페르네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구부러진 상체, 한손은 몸을 지탱하고 한손은 주먹을 쥐는 이 역동적인 자세. 얼굴에는 부분적으로만 빛을 비추며 광란과 비극으로 가득한 절망적인 홀로페르네스를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유디트는 환한 빛을 받으며 그녀의 아름다움과 적장의 목을 벤다는 용감한 행동에 대한 숭고함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빛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며 그림의 의도를 설명합니다.
태양왕으로 유명한 루이 14세! 그는 5세가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라 76세에 세상을 떠난 유럽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입니다. 1643년에서 1715년까지 프랑스의 절대왕정 체제를 주름잡은 자, 17세기 유럽에서 40만 대군을 일으켜 최강의 군대를 거느린 자, 프롱드의 난으로 황폐해진 프랑스를 재건하고 통합한 자. 이 모든 업적이 루이 14세가 가진 타이틀입니다.
그는 평생을 프랑스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수많은 전쟁들, 수많은 개혁들, 수많은 사치들. 모두가 프랑스의 위엄을 나타내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이 14세 자신은 오랫동안 왕위에 있으며 많은 짐을 짊어졌고, 말기에 가족사는 불운했습니다.
가족들이 하나 둘 죽음으로써 증손자만이 왕실을 이을 후계자로 남았습니다. 증손자 루이 15세에게 루이 14세는 위와 같은 말을 남기며 세상을 떠납니다.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 유럽각국의 사회적 권력관계는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평민들은 농노로써 기사들로부터 생명을 보호받는 대신, 농작물을 바쳐야 합니다.
기사는 영주로부터 특정 지역을 관리감독할 권리를 얻는 대신, 자신의 무력을 제공해야합니다.
영주는 본인의 영역에서의 지위를 왕으로부터 보장받습니다. 대신, 왕에게 충성을 서약합니다.
결국 왕은 직접적으로 평민들의 삶에 개입할 수 없었습니다.
영주들에게 영토를 주었고, 그 땅은 기사들이 관리 감독하기로 약속했으니까요. 이것을 봉건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봉건제는 상공업의 발달로 무너집니다. 모든 재산은 땅에서 나오는 농작물에 의존되었지만, 이제 수공업품을 팔아서 생활하는 것이 재산을 늘리기 좋았던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땅에 붙잡힐 이유가 없어졌고, 능력이 있으면 마을을 떠나게 되었으니 기사들의 보호는 필요가 없어져서 별수 없이 기사들은 왕의 군대로 들어가버렸습니다. 기사들이 없어지니 영주들을 지켜줄 사람은 왕 밖에 안 남았습니다. 결국 영주들은 왕의 가신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왕은 평민부터 귀족까지 모두의 삶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절대왕정의 시작입니다.
때는 16세기초, 1517년 마르틴 루터라는 사람이 카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왕들을 누르고 권력을 행사한 교회의 부정에 사람들은 루터의 의견에 함께하여 개신교를 세우게 됩니다.
카톨릭과 유럽 문명의 수호자로서 권위를 내세우던 신성로마제국은 개신교의 확산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결국 긴장은 고조되어 신성로마제국은 카톨릭을 유지하려는 지역과 개신교로 개혁하려는 지역으로 나뉘었습니다.
갈등은 중부유럽의 신성로마제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신앙의 문제를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 너머의 여러 왕국에서도 종교개혁의 바람이 붑니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은 결국 폭발하여 30년 동안의 여러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전쟁은 참혹했고, 이 시기에 독일인의 1/3이 사망하였습니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쟁은 카톨릭의 수호자로서 신성로마제국을 영원히 분열시켰습니다. 30년 전쟁의 결과로 개인의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습니다.
또한, 이때 최초로 근대적인 국제 협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이 탄생합니다. 프랑스, 스웨덴을 비롯해서 개신교 측으로 참전한 각 국가의 영토를 결정 지었으며 민족, 문화의 개념이 모호한 상태로 있던 중세적 관념에서 벗어나 주권국가의 개념이 싹트었습니다.
전쟁은 30년간 여러 차례 진행되었고 어느 한쪽이 완벽한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인적, 물적인 자원을 소모하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지금의 베네룩스,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의 영토를 아우르는 거대한 연합체였습니다.
각 지역의 지도자들은 누가 황제가 될지 선거를 했고, 황제는 여러 지역에서 번갈아가며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힘이 강해지자, 각 지역의 지도자들은 오스트리아가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는데 적합하다고 여겨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황제의 자리를 주게 됩니다.
이후 19세기 초에 나폴레옹이 멸망시킵니다.
온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국교가 된 이후 기독교는 사람들의 정신세계, 문화 등 행동양식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이 몰락하고 제국의 잔해속에서 다양한 왕국들이 성립된 혼란기에도 기독교는 전통을 이어가며 서로마제국 몰락 이후 펼쳐질 중세시대를 설명하는 핵심요소가 되었지요.
로마제국 몰락 이후에 탄생한 왕국들은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존경했고, 이후에 로마제국을 계승-복원하려는 움직임들은 기독교와 유럽의 수호자로서 행하는 활동으로 여겨지며 이에 따라 황제는 교황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예술가들에게 있어서도 기독교는 중세시대와 그 이후에 상당한 기간에도 빼놓을 수 없던 중요한 소재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위상을 지닌 기독교라고 해도 로마의 몰락 이후 르네상스까지 1000년을 이어온 중세가 변화의 바람을 맞았듯이, 기독교의 위상도 변하게 됩니다.
동방의 우수한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기독교가 국교가 되기 이전의 고전. 즉, 그리스-로마에 대한 동경이 싹트는 등 개혁의 열망이 일어납니다.
르네상스부터 미술가들은 인간에 대한 탐구와 인간적인 미美를 추구하게 되었고, 사회에서는 카톨릭에 대한 비판으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유럽인들을 지배하는 확고한 정신적 지주로서의 기독교의 권위를 무너뜨렸습니다.
이후 아이작 뉴턴을 필두로 한 과학혁명, 계몽사상, 시민혁명의 시대를 거쳐가며 정치와 종교는 점점 분리되어 기독교는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규범 짓는 종교의 역할만을 하게 됩니다.
로코코를 어떻게 정리할까요? 절대왕정으로 왕이 예술의 후원자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수적으로 훨씬 많은 귀족계층에서 예술을 후원하지 말란 법은 어디에도 없지요. 로코코는 귀족계층에서 예술을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발달하였는데, 바로크의 웅장함과 빛의 대비에서 벗어나 서정적인 그림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언제부터 로코코의 시대인가?”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바로크가 로코코가 탄생할 기반을 닦아 놓고 그 이후에 궁정문화의 한 갈래로써 뻗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1730년대가 그 시작이라고 그 시기를 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