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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현 Dec 15. 2023

신고전주의

이상을 그리다

신고전주의

는 고전시대의 미술양식에서 볼 수 있는 비례, 균형, 조화라는 가치를19세기에 다시 주류 미술로 돌려놓았다고 해서 신고전주의라고 불립니다. 비례, 균형, 조화는 르네상스의 가치였지요.


르네상스 이후의 마니에리스모, 바로크, 로코코에서 균형과 질서의 중요성이 낮아진 것에 반발하여 권위있는, 존경을 유발할 미술을 찾게 된 것이지요.


물론, 르네상스로 완전히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질서라는 요소를 가져왔을 뿐, 작품에 담긴 표현과 정신은 르네상스와는 다른 새로운 예술이 신고전주의 입니다.

그러면 이번에 달라진 표현과 정신은 무엇일까요?


신고전주의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프랑스 대혁명[1]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왕 루이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당하고 귀족들 역시 죽거나 평민으로 격하되어 혁명에 동참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를 이끌던 지배세력이 한순간에 사라져 공백상태에 혼란스러운 동안에 혁명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함과 동시에 기존의 왕과 귀족들의 문화이던 미술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때, 미술계의 스타 자크루이 다비드가 나타납니다.


자크루이 다비드는 사실 혁명 이전에 이미 왕립회화조각학교로부터 온갖 명예로운 수상경력을 세우며 궁정에서 일하던 성공한 화가였습니다. 그럼에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자크루이 다비드는 혁명파에 가담합니다. 사실, 다비드는 혁명의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였거든요.


그렇게 열성혁명당원 자코뱅[2]이 되어 기존의 궁중 미술을 대표하는 바로크-로코코의 역동성이나 서정적인 미술을 부정하며 다시 고전의 질서와 균형을 중시하는 화풍을 내세웠습니다. 다시 고전의 가치를 되살리자고 하면서 스스로 신고전주의의 대표작가가 되었습니다. 


자크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이상화는 신고전주의의 또다른 특징입니다.

인간이 추구해야할 이상향의 추구는 르네상스에도 있었던 일입니다만, 시대와 사회 배경이 워낙 다르다 보니 동일선상에서 놓고 평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18세기 말기 혁명의 시대에는 국민과 국민국가[3]의 개념이 확립되고 이는 영구적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게 됩니다. 변화의 시대에서 시민들에게 모범이 되는 자. 영웅의 존재는 중요해집니다.


한편, 사회적으로는 혁명의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자코뱅은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사형을 남발하여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고 결국 혁명정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4]의 쿠데타로 몰락하게 됩니다.


자크루이 다비드는 자코뱅임에도 불구하고 미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숙청을 피하고 나폴레옹의 전속화가가 됩니다. 나폴레옹의 전속화가가 된 자크루이 다비드는 매우 정치적이면서 이상화된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고 나폴레옹과 운명을 함께하게 되는 그런 신세가 되었습니다.




[1]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 대혁명은 신분제 사회의 모순과 불만이 프랑스에서 한 번에 터져 나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급격한 사회변동입니다. 

장피에르 루이 로랑 위엘 <바스티유 습격>

Aux armes, citoyens! 무기를 들라 시민들이여!

-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후렴구


앙시앵 레짐(구 체제) 이라는 단어로 정의되는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게 한 대사건 입니다.


그 배경에 있어서는 그 해석과 설명이 너무나도 방대합니다. 따라서 혁명의 이유를 하나로 콕 집어서 이야기 하기에는 매우 곤란합니다.


그나마 정리해보자면, 사회는 이미 산업혁명을 앞두어 상공업의 발달이 극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층이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이들은 평민이었기에 귀족과 성직자가 누리던 특권이 없었습니다.


귀족들은 절대왕정 이전에는 상위 지배자에게 무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지만, 절대왕정의 확립으로 상비군 제도가 갖추어집니다. 더 이상 귀족들의 사병들을 동원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입니다. 그에 따라 귀족은 의무는 없고 권익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성직자들은 종교활동에서 오는 소득이 분명하게 존재했지만 그 어떠한 세금도 내지 않았습니다.


시대는 바뀌어서 귀족과 성직자는 존재의 의미를 잃어가지만 그들은 엄연히 지배계층이었습니다. 납세와 부역 등은 오로지 평민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평민이 국가의 모든 부를 창출함에도 의무만 부여된다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었습니다.


1789년 5월 5일, 사회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삼부회가 소집됩니다.


삼부회는 귀족, 성직자 그리고 평민으로 각각의 신분을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서 국론을 논하는 회의입니다. 여기서 평민 대표는 1인 1표를 주장했습니다. 인원수로도 우세이며 평민에 동정하는 일부 귀족과 성직자를 포섭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귀족과 성직자는 각 계급별로 1표를 주장했고, 투표 방식의 문제는 끝까지 해결되지 못합니다.


결국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 채 삼부회는 끝이 납니다. 


그러나 평민 대표들은 단독으로 국민의회를 표방했고 의회제를 주장합니다. 놀란 국왕 루이 16세는 진압을 명령하고 군인들은 회의장을 폐쇄합니다. 


자크루이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서약>

분노한 평민 의원들은 당월 20일, 테니스 코트에서 헌법이 제정되기까지는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 코트의 서약" 을 행합니다.


평민의 처지에 동감하던 일부 귀족과 성직자까지 가세하여 평민 의원들을 지지하자, 루이 16세는 헌법제정 작업을 승인합니다. 


다만, 이때 루이 16세는 치명적인 실수를 벌이고 마는데 국경 수비군을 파리와 베르사유 궁전으로 집결시키고 파리 시민들의 지지를 받던 재무총감을 파면합니다.


결국 헌법을 언제든 폐기할 준비를 갖추던 국왕의 행보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왕의 군대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합니다. 이렇게 세계사를 영원히 바꿀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2] 자코뱅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의 지도자이며 공포정치의 주도자이다.


프랑스 혁명기 공포정치는 반혁명적으로 분류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사형을 남발한 사건.

공포정치에 의한 피로로 인해 발생한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는 죽는다.


자코뱅은 본래 프랑스 혁명시기 다양한 계파가 모인 정치 클럽의 이름이었습니다만 이후 정적이 되어 완전히 돌아선 지롱드파 역시 자코뱅 클럽의 일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국왕 루이 16세와 그 가족이 외국으로 도망쳐 프랑스 혁명정부가 유럽 각국의 침략을 받도록 한 바렌 사건이 벌어졌고, 가장 급진적이었던 로베스피에르의 산악파가 자코뱅 그 자체가 되어 정권을 잡습니다. 자코뱅(산악파)은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고 반혁명파로 간주되는 정적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코뱅이라는 이름은 급진 혁명파를 상징하게 되어 유럽 정치사에 이름을 남깁니다. 1794년의 테르미도르 반동까지 말이죠.


1795년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프랑스 혁명은 막을 내립니다.

자코뱅은 국민공회의 의석에서 왼쪽편에 앉았기에 오늘날 정치성향을 의미하는 좌우의 개념이 이때 탄생합니다. 



[3]국민국가

근대에 그 개념이 잡힌 국가형태입니다. 국민이라는 집단이 주체가 되어 존속하는 국가를 말합니다.


고대와 중세에는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 즉, "민족" 의 개념이 옅었습니다. 특히 중세시대에는 왕족들 간의 결혼과 죽음으로인한 영토와 재산의 상속 문제로 언제나 국경이 변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경 속에서 평민들은 지배자의 소유물일 뿐이었습니다. 평민들에게 있어서도 언제나 바뀌는 국경과 지배자로 인해 공통적인 문화를 향유하는 시민이라는 개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며 변화가 생깁니다. 30년 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한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주권 국가와 영토의 개념이 확립됩니다. 


이제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각 국가들은 체제의 안정을 찾아가고 서서히 각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이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국민국가의 탄생은 멀었습니다.

진정한 국민국가는 프랑스 대혁명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민중이 스스로 일어서 주권을 찾게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민중을 소유물로 보던 구 체제의 왕과 귀족들은 모두 처형되었으며 프랑스 민중은 왕의 보호를 떠나서 그 운명을 스스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는 온 유럽의 여러 왕국들의 침공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전 유럽의 침공을 받게 된 프랑스이지만, 프랑스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반 프랑스 동맹의 군대는 왕이나 귀족의 사병이었고, 동원과 훈련에 있어 비싼 값을 치뤄야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미 왕의 보호를 떠나 스스로의 운명을 정해야 했던 만큼, 혁명으로 이룬 주권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애국심을 불태워야 했습니다. 


주권을 가진 민중은 징병제에 마땅히 응했고 순식간에 프랑스는 100만 대군을 소집합니다. 각 유럽의 왕들은 재정을 쏟아부어도 100만에 이르는 군단을 편성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반 프랑스 연합군은 개인의 기량으로는 전투력을 앞설지 몰라도 결국 동원 능력의 한계로 인해 프랑스를 굴복시킬수는 없었습니다. 프랑스 단 하나의 국가로도 반 프랑스 연합군 전체의 병력 수를 압도하고 있었기에 끝내 프랑스는 견뎌내었습니다.


공통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단결한 민중이 주권을 가진 국민국가는 왕의 소유물에 불과한 형태의 국가를 압도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애국적 열정이라는 것이 이러한 모든 변화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결국 현대에 이르러서는 남은 군주제 국가들도 민중의 동의 없이는 함부로 법 위에 군림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군주가 헌법 아래에 있는 입헌군주제의 확산으로 군주제 국가의 민중도 국민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고 국민국가는 보편적인 체제로 자리잡게 됩니다.



[4]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자크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프랑스 남쪽 지중해에 위치한 코르시카 섬 출신의 군인입니다. 사관학교를 나오고 장교가 되는 시기에 프랑스 대혁명을 겪게 됩니다.


프랑스는 혁명을 두려워한 전 유럽의 견제를 받게되어 반 프랑스 전쟁을 겪게 됩니다. 여기에 왕당파의 봉기도 각지에서 일어나던 실정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툴롱 포위전, 이탈리아 원정 등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집트로의 원정까지 나섭니다.

그러나 이집트 원정 도중에 프랑스로 귀국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정치를 평정합니다.




나폴레옹은 대륙법 체계의 원조가 되는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하고 만민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원칙을 전 유럽에 선언합니다.


그리고 곧 1804년 나폴레옹은 황제로 즉위합니다.


물론! 나폴레옹의 황제 체제는 이전의 왕정과는 달랐습니다. 


이전의 왕정은 왕권 신수설과 신분제를 통해 민중과는 철저히 분리되는, 천부적인 권능으로써 통치하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프랑스인의 황제” 라는 개념으로써 프랑스 민중의 애국적 열정을 기반으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이 얻은 황제라는 작위 역시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써 로마의 교황이 하사하는 작위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황제 관을 자신이 직접 머리에 썼습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온 유럽을 호령하고 적들을 격파하는 위엄을 보입니다.

아돌프 노르텐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그러나 러시아 원정에서 참패한 이후 나폴레옹의 위세는 꺾이고 결국 엘바 섬으로 유배갑니다.


나폴레옹은 엘바를 탈출하여 한 번 더 기회를 잡아 황제가 되지만 1815년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더 이상 그는 재기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후 나폴레옹은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가고 그곳에서 그는 죽게됩니다.



참! 자크루이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눈에 들어서 전속화가가 되었다고 했지요?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말았는데 자크루이 다비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하게도… 그는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벨기에로 망명가서 그곳에서 여생을 보냅니다.


나폴레옹과 함께 영광 그리고 몰락을 경험하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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