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서 산 보라색 몸빼 바지가 마음에 든다. 이 새 소리는 나이팅게일이라고 했던가. 내가 도시가 아닌 시골에 왔음을 실감하게 해주는 bgm이었다.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평상에 누웠다. 발꼬락을 느릿느릿 꼼지락거려본다. 햇빛에 탈까봐 밀짚모자로 얼굴을 덮어주었다. 지푸라기 냄새가 난다. 깃털같은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모자가 날아가 버렸다.
"그래, 가라."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형형색색의 실타래가 뒤죽박죽 얽히고 설킨 채 둥둥 떠다녔다. 그 실뭉치를 가만히 바라보며 멍 때리기를 시작했다.
"아, 좋다."
인절미색 시고르자브종 똥강아지가 내 배 위로 올라와 얼굴을 핥는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인절미를 천천히 쓰다듬다가 강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까맣게 반짝이는 그 생명체의 눈을 보니 내 영혼도 정화되는 듯 했다. 뽀시래기 냄새가 내 마음을 더 안정시켜주었다.
가마솥에 누룽지 먹고 싶다. 문득 시장기가 느껴진 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아궁이의 불을 때어 가마솥에는 밥을 짓고 부탄가스를 넣은 버너로 된장찌개를 끓이기로 했다. 매캐한 연기에 눈물 콧물 쏟으며 겨우 아궁이에 불을 붙여 쌀밥을 지었다. 장독대에서 시골 된장을 숭덩숭덩 그릇에 담아와 냄비물에 투하했다. 밭에서 호박과 고추를,냉장고에서는 두부를 공수해왔다. 촌스럽고 익숙한 냄새가 공간을 가득 매우자 이미 코로 된장에 비빈 밥 한 그릇을 뚝딱 한 기분이었다.
평상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숭늉까지 만들어 먹었다. 빈그릇을 물에 불려 놓은 채, 평상에 누워 또다시 멍을 때렸다.
어둑어둑해지자 벌레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방에 들어가기 싫었다. 촌집 사장님께서 5분 거리에 바다가 있다고 하셨으니 한번 가보자. 슬리퍼를 신고 보라색 바지를 펄럭거리며 집을 나섰다. 인절미가 쫄래쫄래 따라오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500m 정도 걷자 검정색과 쪽빛 사이의 바다가 보였다. 슬리퍼를 벗고 백사장을 걸어 들어갔다. 뽀득뽀득한 모래의 감촉을 느끼고 싶어 한동안 걷다가 풀썩 앉아버렸다. 또 눈을 감고 평상멍에 이어 바다멍 때리기에 몰입했다. 규칙적이고 포근한 파도소리, 낭만적인 풀벌레 소리가 백사장에 울려퍼졌다. 간만에 만끽하는 여유였다. 시간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파도를 너울너울 타고 있는 기분이랄까?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톺아가는 느낌.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이거지.”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그렇게 미각만 뺀 오감으로 바다를 만끽했다. 시간의 파도를 너울너울 타다 못해 멈춰진 시공간 속에 머무르는 초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나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벅찼다. 내가 다니는 직장, 내가 맺고 있는 관계,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만 가득했던 내 마음 속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닷바람에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겉옷을 챙길 생각을 못했구나.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다시 촌집으로 총총총 걸어갔다. 똥강아지는 잠 들었으려나? 정겨운 싸리문 울타리 속 대문을 들어서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아악! 누구세요! 사람 살려!”
가로등이 없어 껌껌한 와중에 검은색 실루엣이 평상에 무언가를 놓고 있었다.
“아! 깜짝이야... 주인집 아들입니다. 어머니께서 두릅을 좀 전해 드리고 오라고 하셨는데 안 계셔서요.”
그는 급하게 후레쉬를 켜며 말했다. 중저음 목소리에 발음이 또박또박한 남자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도착했을 때 얼핏 뒷모습을 본 것도...
“아... 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놀라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본의 아니게 죄송합니다.”
“네, 괜찮아요. 저도 너무 크게 소리친 것 같네요. 하하하...”
심장이 여전히 뛰었다. 아직 놀라서 뛰는건가. 저 남자의 목소리가 좋아서 뛰는건가. 아니면 저 남자가 살짝 내 이상형을 닮아서 그런건가. 미친듯이 솔직한 내 심장 소리를 숨기고만 싶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 사람도 이 상황이 황당하지만 재밌나보다.
“바닷가 다녀 오신거예요?”
“네, 밤바다가 정말 아름답더라구요.”
“거기가 아는 사람만 아는 우리 마을 자랑이에요.”
“와, 완전 제 스타일이었다니까요. 이 마을에서 쭉 사신 거예요?”
“아니요. 고향은 여기인데 서울에서 대학 졸업하고 취직했다가 퇴사하고 이직 준비하면서 잠깐 내려왔어요. 마음이 복잡해지니 시골 생각이 간절하더라구요.”
“저도 마음이 시끄러워서 촌캉스 온건데... 여기서 동년배를 만날 줄은 몰랐어요.”하며 혼자 동년배 확정하고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처음 만났는데 이렇게 티키타카가 잘 된다고? 이게 말로만 듣던 자만추, 뭐 그런건가? 심장은 아직도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때, 익숙한 내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받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 울려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흠... 여보세요. 응? 왜 이래?”
전화를 받았는데도 벨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난 머쓱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거 알람 소리예요.”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
그렇게 나는 잠에서 깼다. 그렇다. 다 뻥이었다. 현실이 노잼이라 백일몽을 꾸었더랬다. 이번 달에는 촌캉스를 갈 수 있을까.
p.s. 여유로운 만우절 주말 보내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