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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거인 Dec 16. 2023

나는 정겨운 남자니까

 무를 뽑고 양념을 준비하면서 시작한 김장을 끝내기까지 사흘이 걸렸다. 이틀은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날씨는 따뜻했다. 저녁까지 배추에 소를 넣는 일을 하는 동안 남편은 수육을 삶았다. 대충 총각김치와 잔무에 양념을 버무려만 놓고 뒷정리는 내일로 미루었다.

  우리 부부는 늘 그랬듯 '김장의 완성은 수육이다.' 라며 잔을 부딪쳤다. 2년 전만 해도'' 맥주는 음료수다. 소주만이 술이다.라고 외치던 나였는데 나이는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다음날, 남편은 하루 묵은 김치를 저장고로 옮겼다. 나는 분리해 놓은 김치가 섞이면 안 된다고 남편에게 당부했다. 나는 거실에서 밖으로 건네주려고 김치통 앞으로 갔다. 김치통에 위에 '먼저 먹을 것' '무시'라고 적힌 메모지가 앉아 있었다.  볼펜과 메모지를 찾으러 다니더니 메모를 해서 뚜껑 손잡이에 달아 놓은 것이었다. 그 모습이 떠 올라 웃음이 터졌다.

 '여보! 무시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정겹냐? 정말 오랜만에 본다."

 "나는 정겨운 남자니까! "

입가에 개구진 미소를 담은 남편이 한 마디 툭 던지고는 김치통을 들고 저장고로 향했다.

 "인정!"

나는 저장고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남편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어제 버무려 놓은 총각김치가 적당히 간이 베어 숨이 죽었다. 보조 주방에 앉아 김치통에 차곡차곡 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등 뒤로 문이 열리더니 남편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여보! 배추 이파리 절인 거 씻어서 갔다 놨어"

이제 이 일만 하면 끝나는데 또 뭐가 있지? 란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빨간색 사각 바구니에는 시퍼런 배춧잎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이런! 말려서 우거지 용으로 쓰려고 가져온 것인데 남편은 그것마저 절궈서 씻어서 가져온 것이었다. 일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 내 탓이었다.

지쳤는데 닭 모이로 줘 버릴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남편의 정성을 어찌하지 못하고 절여진 배추를 주우죽 찢었다. 조금 남아있던 김장소에 새우젓과 고춧가루 그리고 소금 한 줌 더했다. 골고루 버무려 통에 담으니 또 한 통이다. 맛있게 익으면 돼지등뼈를 고아야겠다.

뒷 설거지를 끝내고 들어와 '이제 올해 김장도 끝났다.' 라며 거실에 누웠다.

남편은 '난 벌써부터 내년 김장이 걱정이다.'라며 내 옆에 누웠다. 부부의 웃음이 천장을 뚫을 기세로 거실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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