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거인 Dec 17. 2023

숭한 날씨를 즐기는 방법





 전날 김장 설거지를 끝냈지만 무를 썰어야 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의 김장은 3년 전보다는 절반으로 지난해보다는 3분의 2의 수준으로 양을 줄였다. 하지만 무의 개수는 지난해보다 배가 늘어났다. 나는 해마다 김장에 사용하고 남은 무는 썰어 말린다.  겨울 동안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며 말린 무를 팬에 덖어 차를 만든다. 달달하고 시원하고 구수한 차를 일년내내 우려 마신다.



  

나는 무를 썰기 위해 거실 한가운데 따뜻한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엉덩이를 지지며 가운데 초록색 부분을 골라 연신 입으로 가져갔다.





  엉덩이가 가벼워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남편은 밖에 나가 일거리를 찾아 기웃거렸다. 지난겨울 데크에 비가림 지붕을 뜯어내고 다시 씌웠다. 그런데 지붕 한 쪽이 기울고 있었다. 일을 찾던 남편은 그곳에 지지대를 세운다며 사각 철근을 세워 용접하고 있다.






연신 무를 집어 먹어서 그런가? 아직 이른 시간인데  배가 고팠다. 거실문을 열었다. 밖에는 여전히 눈바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람에 두들겨 맞은 풍경은 아프다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여보! 날씨도 지랄인데 뜨끈한 짬뽕 먹으러 가자!”






 우리는 가끔 가는 단골 짬뽕집으로 갔다. 삼선짬뽕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주방에서 요리하던 남자 사장님이 주문한 음식을 직접 가져왔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서로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사장님은 음식과 소주를 테이블에 놓아주며 물었다.
거인님! 술 끊었다면서?”
나는 짬뽕집 사장님 부부에게 언니와 형부라고 불렀다.
“에이! 형부는 이런 숭한 날씨엔 요거 한 잔 마셔 주는 게 지랄같은 날씨에 대한 예의지요.”
나의 황당한 대답에 사장님은 껄껄껄 웃으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운전해야 하는 남편은 잔만 받아 놓고 나는 빈속에 소주 한 잔을 밀어 넣었다. 찌르르한 전율이 혈관을 타고 돌아다녔다. 칼칼한 짬뽕국물에 소주 반 병을 비웠다.
‘그래 내가 한동안 소주를 끊었지만 이렇게 눈바람이 불고 속 시끄럽게 하는 날씨엔 소주 한 잔 마셔 주는 게 날씨에 대한 예의 아니겠어?’




 알딸딸하게 기분이 좋아진 나는 지리산 천왕봉이 보고 싶어졌다. 남편의 손을 잡고 길 건너 카페로 들어갔다. 따끈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통창 너머에 천왕봉은 하얀 베일 속에 숨어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남편이 눈을 통창 너머로 보내며 중얼거렸다.
“천왕봉 안 보이네.”
“당신은 천왕봉이 안 보여? 나는 보이는데. 내리는 눈에 가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나는 보인다. 지리산 숲 속에 설경이 그대로 그려진다. 아~! 눈 내리는 숲 길을 걷고 싶다.”
나는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창 너머 천왕봉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찌찌뽕! 한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