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석가탄신일이나 성탄절이나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우리에겐 12월 24일은 4일 9일에 열리는 덕산장에 의미가 있다. 아침을 먹은 우리는 장구경에 나섰다. 예전엔 지리산을 등에 업고 덕산약초시장으로 호황을 누렸던 적도 있었다. 약초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이젠 명목만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어슬렁어슬렁 장터를 걸으며 쌀빵언니와 인사하고 야채아줌마의 안부를 물었다.
생선을 파는 좌판을 지나는데 남편이 한 마디 툭 던졌다. "저녁엔 동태찌개 끓여 먹을까?" 생선 요리에 자신이 없는 나는 그냥 지나치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사장님 동태는 얼마예요? "세 마리 만원입니다." "세 마리만 잘라주세요." 남자 사장님은 동태 한 마리를 들어서 작두 날을 들어 싹둑싹둑 잘랐다. 사장님의 손놀림을 내려다보던 "옛날에는 나무 도마에 놓고 칼로 내리쳤는데."라며 남편이 추억을 떠올렸다. 이제는 녹이 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재질로 된 작두로 썰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오래전 사건 하나가 떠 올랐다. 아니 동태 옆에는 1+1처럼 항상 그 사건이 함께 있다. 시아버님의 생신은 늘 집에서 음식을 해서 시고모님들 부르고 6남매에 손주들까지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보냈다. 딱 한번 외식을 했다가 가출 사건이 있은 후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서 차려드렸다. 그 사건이 있던 날은 생신 전날이었다. 다음날 손님 초대를 위해 전날부터 음식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동태 전을 좋아하시던 아버님은 음식에 동태 전이 빠지면 역정을 내셨다. 그때는 어물전에서 직접 포를 떠 주었다. 동태 전을 부치기 위해 시장에 나가 포를 떴다. 포를 뜨고 남은 대가리는 찌개를 끓이려고 따로 포장해서 가져왔다. 무만 넣고 끓인 찌개를 좋아하셔서 저녁으로 얼큰하게 끓여 드렸다. 시아버님은 대가리의 뼈를 쪽쪽 발라 내시며 소주를 곁들여 맛있게 드셨다. 할아버지의 붕어빵인 작은아들은 식성까지도 닮았다. 옆에서 할아버지가 주는 소주를 홀짝홀짝 받아 마시며 찌개를 먹고 있었다. 나는 주방에서 음식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아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돌아서서 보니 아들의 손은 입 속에 들어 가 있고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목에 뼈가 걸린 것이었다. 시어머님은 식은 밥 한 숟갈 넘기면 괜찮다고 했다. 다행히 찬밥이 있어서 넘겨 보게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이는 연신 컥컥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남편에게 119를 부르라고 외쳤다. 당황한 남편은 무선 전화기를 찾아 우왕좌왕했다. 아이는 고통이 점점 심해지는지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은 이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두고 119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이 밑에 누웠다. 아이의 입 속에 내 검지 손가락을 깊숙이 넣었다. 손가락 끝에 뼈에 느낌이 느껴졌다. 뼈는 아이의 목에 가로로 세워져 있었다. 검지 손가락을 조금 더 깊이 넣어 손끝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앞으로 밀어냈다. 아이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아이의 입에서 나온 뼈는 생각보다 컸다.
작은아들의 나이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그때의 내 행동은 새끼를 살려야 한다는 어미의 본능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시간을 자주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내는 아들도 그때의 기억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들은 여전히 동태찌개를 좋아한다.
그때처럼 무만 넣고 동태찌개를 끓였다. 남편과 나는 식탁에 마주 앉아 시아버님을 모셨다. 작은 아들도 불렀다. 둘이 아닌 넷이 먹는 만 원의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