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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못하는 물건 하나,

by 작은거인




누구나 비싼 물건이 아니더라도 선뜻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 한, 두 가지쯤은 있지 않을까?
내게도 그런 물건이 하나 있다. 20여 년 전의 이야기다. 남편은 장남이지만 시부모님은 시동생 부부와 함께 살았다.
사정상 시동생 부부와 같이 살 수 없게 되어 우리 집으로 오셨다.
그때 시아버님은 당뇨 합병증을 심하게 앓고 계셨고 시어머님은 아파트 공사장에서 못을 뽑고 청소를 하는 잡일을 하러 다니셨다.
생활력 없는 시아버님을 대신해 평생 일만 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나신 분이다.

어머님이 우리 집으로 오시고 한 달쯤 지났을 때다. 일을 끝내고 온 어머님 손에 반짝반짝 빛나는 은박지 방석이 들려 있었다.
처음 보는 방석이라 신기해서 어머님께 뭐냐고 물었다.
"너 보니까 쌀 항아리에 뚜껑이 없더라. 항아리 뚜껑하라고 만들어 왔다."
나는 그때 금이 가고 손잡이 하나가 깨진 항아리를 쌀항아리로 사용하고 있었다. 뚜껑이 없어 쟁반을 올려 두었다.
어머니에게서 받아 든 방석은 가볍고 폭신폭신했다. 스펀지를 넣고 은박지로 싸인 둥근 단열재를 납작하게 눌러 둥글게 말아 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어머니! 그런데 이거 뭐로 만드신 거예요?"
목소리도 작은 어머님이 느리게 말을 이어갔다.
"수도관에 쓰는 건데 물 얼지 말라고 호수에 입히는 단열재로 만든 거야. "
"어머니 이거 굳아이디어인데요? 가볍고 깨질 염려 없고 너무 좋아요."
어머님의 자분자분한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네가 맘에 안 들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맘에 든다니 고맙다."

세월이 흘러 반짝이던 은빛은 빛을 잃었다. 못은 녹슬어 단열재에 스며들어 얼룩을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방석, 아니 항아리 뚜껑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가볍고 튼튼해서 뚜껑을 열 때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그만한 뚜껑을 구할 수 없다. 밥을 하려고 쌀을 풀 때마다 어머니 얼굴이 떠 올라 좋다.
가끔 남편은 새로 똑같이 만들어 줄 테니까 그만 쓰고 버리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남편의 새것 보다 오래된 시어머님표 항아리 뚜껑이 더 좋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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