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거인 Sep 26. 2023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했다.


  특별히 농사를 크게 짓는 것도 아니다. 겨우 우리 부부 입에 들어가는 텃밭 농사를 짓는다. 그럼에도 기계 없이 오로지 몸으로 짓는 농사다 보니 손 가는 일은 끝도 없이 많다.

     


  봄이면 거름 내고 삽질해서 흙을 뒤집고 쇠스랑으로 땅을 고르는 작업을 한다.

그러다 보면 샘에서 물이 쉬지 않고 솟아나듯 몸에도 쉴 새 없이 땀이 흐른다. 머리에서 시작하는 땀은 몸에 걸친 옷을 다 적시고 이제는 흙까지 적실 기세로 쏟아낸 후에야 흙을 깨우는 일이 끝난다. 씨앗을 뿌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뾰족뾰족 연두들이 기지개를 켜며 하품한다. 나는 매일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그들과 수다를 떤다.     



 여름이면 풀과 1차. 2차. 3차전까지 전쟁을 치른다. 그나마 3차전에서 끝나면 다행이다. 올해처럼 비가 늦게까지 자주 내리면 5차전까지도 이어진다. 모기의 입이 돌아간다는 절기 처서가 지나면서 기세 좋던 풀들도 세력 확장을 포기한다.

아니 포기가 아니라 더 많은 세력 확장을 위해 씨앗을 품고 음흉하게 숨을 죽인다.   

  


 김장 무씨를 파종하고 김장배추를 심는 사이 하늘에서 쏘아대는 영양을 듬뿍 빨아들인 곡식들이 익어간다. 하늘은 높고 구름은 맑고 햇살은 따갑다. 톡톡톡 곡식들이 여물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을 거두어야지.      

 고추 심었던 밭에 마늘과 양파를 심기 위해 고춧대를 뽑아 정리한다. 어제는 땅콩을 캐고 오늘은 참깨를 벤다. 산행하기 좋은 계절인 가을, 마음은 산으로 가 있다. 하지만 매일 텃밭에 묶여 있는 요즘이다. 대단한 농사를 짓는다고 ‘산에도 못 가고 에휴!’ 구시렁거려 보지만 농사일이 싫은 건 아니다.    



  

 나는 농부의 딸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어려서부터 흙을 만지며 노는 걸 좋아했다. 아버지는 내가 흙 만지며 노는 걸 싫어하셨다. 마당 한쪽에 꽃밭을 만들어 놓으면 아버지는 어느새 그 화단을 망가뜨렸다. 애써 만들어 동네 언니들에게 꽃모종을 얻어다 심어 놓은 화단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 눈을 피해 흙을 만지며 놀았다. 하지만 두 해를 그렇게 화단이 망가지는 걸 경험한 나는 그 이후로 다시는 꽃을 심지 않았다.  



    

 결혼해서 도시에 살면서 흙에 대한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나무 한 그루 심을 땅만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흙의 촉감, 흙냄새가 그리웠다. 그 갈증은 나를 산으로 가게 했다. 산길을 걸으며 숲과 대화했다. 울고 싶으면 울었고 힘들면 주저앉아 쉬었다 오곤 했다. 산은 언제나 그곳에서 말없이 나를 품어주었다. 그렇게 산에 빠져 살던 나의 귀촌은  정해진 수순이었을 것이다. 흙을 만지는 일은 즐거움이고 행복이다.   


  

  추석에 먹으려고 뿌려두었던 무가 갓난쟁이 거시기만 하게 자랐다. 김장용 무도 솎아 줄 때가 이미 지났다. 크게 자랄 수 있도록 실하게 생긴 놈으로 하나씩만 남기고 모두 뽑았다. 올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가을 부추도 베었다.

마당 수돗가에 모아 놓고 앉은뱅이 의자를 가져와 그늘을 찾았다. 라디오를 켰다. 김창완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귀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따라 움직이고 손은 눈을 따라 움직였다.      

 시장에서 사는 채소들은 수확하면서 농부들이 일부 다듬어 내놓으니 일이 수월 하지만 밭에서 직접 뽑은 채소들은 흙을 털어내는 일부터 시작해서 다듬는 일이 만만치 않다. 누가 허리를 콕콕 쑤셔댄다. 잔돌이 박힌 것처럼 엉덩이가 욱신거린다. 일어나 기지개 한번 켜고 씰룩씨룩 엉덩이를 흔들어 본다.

 다듬고 씻고 절이는 일은 점심을 먹은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감자를 찌고 마늘과 양파를 까고 건고추를 손질해서 씻었다.




 준비한 재료를 분쇄기에 갈아 양념을 만들어 버무렸다. 양푼에서 채소에 양념이 스며들어 숨이 죽기를 기다려 다시 한번 더 버무렸다. 두 통의 김치통에 차곡차곡 담았다.      

 한 통은 추석 쇠러 수원 사는 아들 집에 올라갈 때 가져가야지. 그리고 고향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 갈 때 밥과 고추장, 들기름을 준비해야지. 양푼에 슥슥 비벼서 아버지와 술 한 잔 주거니 받거니 해야지. 결국 내가 흙을 만지며 살고 있다고 하면 산소에서 벌떡 일어나 역정을 내실까? 살아생전 성정으로 봐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실 양반이다. 수돗가에 멍하니 앉아 뒷설거지는 잊은 채 실없는 상상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또 혼자 피식거리며 웃는다. 라디오에서는 다섯 시를 알리는 신호음이 흘러나온다. 어느새 태양이 마당에 그림자를 데려다 놓고 가버렸다.

 집 앞에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했다. 가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말, 진실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