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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거인 Oct 08. 2023

품삯

아침 운동길에 만난 대추

                    

  여름이 떠난 자리엔 어느새 가을이 냉큼 자리를 잡고 들앉았다. 삼삼오오 모여 또는 무리 지어 수다를 떨고 있다.


  벼이삭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개를 숙인 채 수군거리고  밤송이들은 부푼 배를  부풀리며 아가리를 힘껏 벌리고 노래를 부른다. 코스모스들이 그 음률에  맞춰 춤추고 있다. 감들은 가을 무도회라도 가려는지 서둘러 형광빛의 주홍색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 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대추도 옷을 갈아입고 있다.

 

대추나무 아래는 체구가 작은 어르신의 손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다. 위로 손을 뻗어 보지만 구부정한 허리는 고집스럽다.  길가에 파란 바구니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속엔 대추 몇 알이 뒹굴고 있다. 

 나는 그 길을 걷는다.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며 어르신의 뒤통수에 대고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구부정한 노인이 돌아본다.

 "예. 운동하시는 가베? 어디서 오셨소?"     




  어르신의 물음을 흘려버린 나는 바구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졸망졸망한 대추에 눈을 둔다. 파란 바구니에 어르신 손에서 떨어져 나온 대추가 들어 있다.

  "대추 따시나 봐요? 저 이거 한 알만 먹어도 돼요?"

  "드시구려. 그란디 이거 쌩건디?"

  "제가 생대추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나는 정말 생대추를 엄청 좋아한다. 그래서 대추나무를 열 그루나 심었다. 대추나무는 꽃을 늦게 피운다. 꽃 필 때쯤 장마가 왔고 잦은 비 탓에 다 떨어지고 열 알도 안 되게 열렸다.     

  잘 익은 대추 한 알 집어서 냉큼 입 안으로 넣었다. 딱딱한 대추씨를 피해 씹었다. 대추 알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상큼함과 달달함의 육즙이 배어 나온다.

  "이거 요즘 개량종 아니고 토종 대추지요?"

  "암만! 너무 잘아서 일이 많아. 요즘 것처럼 커야 일이 수월코 근이 많이 나가는데."

  "그래도 이게 더 맛있잖아요."

 쭈그리고 앉은 체 고개 들어 다시 대추나무를 바라본다. 대추를 주렁주렁 매달아 힘에 겨워 허리가 땅에 닿을 듯한 나뭇가지를 간짓대가 받치고 있다. 벌떡 일어난 내 손은 어느새 대추를 한 알씩 따서 바구니에 던졌다.


 그사이 어르신보다 덩치 하나가 더 있는 할머니가  앞치마를 두른 불룩한 배를 앞세 우고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한체 대추나무 아래 섰다. 어르신의 만류에도 내 손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바구니가 빠르게 채워지는 중에도 내 입은 연신 오물거린다. 대추나무를 가운데 두고 어르신의 말이 건너왔다.

  "하신마을에서 오셨소?"

  "아니에요. 예치마을에서 왔어요."

 "쩌짝 윗 말? 하고야 제법 먼디? 여까정 운동을 왔소?"

  "쩌 아래 국동마을에서부터 걸어요. 집까지 두 시간 걸려요."

  "거기서는 두 시간 더 걸릴거인디?"

  "제가요. 다리는 요래 몽땅해도 걸음은 쪼메 재거든요."

도란도란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한다. 어느새 삼십여분 훌쩍 지났다.     

  "어르신 저 다섯 알만 가져갈게요."

  "많이 가져가소."

  "그럼 열 알만 가져갈게요."

할머니가 파란 바구니에 양손을 넣어 대추를 가득 담아 올린다.

  "넣을 때 없어요. 조금만 주세요."

그러면서 나는 바지 주머니의 아가리를 활짝 벌린다. 할머니는 또 양손 가득 담아 올린다. 반대쪽 주머니의 아가리를 냉큼 벌린다. 걸을 때마다 주머니 속 대추들이 아우성을 친다. 발은 걷고 손은 주머니로 입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집에 도착할 쯤엔 한쪽 주머니가 텅 비었다.

 집 안으로 들어와 접시에 다른 주머니에 있는 대추를 담았다. 접시에 한 가득이다. 아껴 먹으려고 식탁 귀퉁이에 놓아두었다.


 퇴근한 남편은 대추가 담긴 접시를 보더니 손이 쉬지 않는다. 출처도 묻지 않고 먹어댄 남편 덕에 접시가 순식간에 비워지고 있다. 나는  손을 멈추게 한다.

"이거 삼십 분 대추 따 주고 받은 내 품삯이야. 그니까 그만 먹어. 아꼈다 낼 먹을 거야."

접시로 가던 남편의 손이 얼음이 된다. 나는 ‘얼음땡’ 하며 남편 손등을 툭 친다.  손이 스르르 테이블 밑으로 내려간다. 대추가 담긴 접시를  내 가슴에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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