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마음을 다해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나였을 수도 있었고, 내 친구들이었을 수도 있었고, 앞으로 내 친구들이 될 수도 있었던 내 나이 또래들이었다. 20대 초, 중, 후반대에 아직은 떠나보내기에 너무 아까운 별들. 꿈을 펼쳐 보기도 전에 말도 안 되게 떠나가 버렸다. 추운 길바닥에서 떠나가 버렸다. 가족과도 친구들과도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다. 코스튬을 입고 할로윈 축제를 즐기러 갔을 뿐이었다.
1보가 방송에 나가기 전에 나는 우리 회사 제보방에 올라오는 영상들을 봤다. 솔직히 감이 오지 않았다. 몇몇 술 취한 친구들이 발을 헛디뎌서 아니면 뭐 그러한 비슷한 이유로 세상을 떠난 줄 알았다. 그런데 계속 올라오는 영상들을 보고는 무언가 아주 많이 잘못됐다는 감이 오기 시작했다. 아무나 잡고 CPR을 하는 경찰들, 소방대원들, 시민들이 보였지만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이게 다인가? 더 있어야 할 경찰들과 소방대원들은 다 어디 갔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희생자 수는 늘어나고 또 늘어나 오늘 기준 외국인 26명 포함 156명이며 부상자는 중상 33명 포함 196명이다. 장례의 경우 외국인 사망자 26명 중 본국 송환을 포함해 17명, 우리 국민 사망자 130명이 완료됐다.
10월 29일 오후 6시부터 112에 최초 신고가 접수됐다고 한다. 오후 9시부터 신고가 늘고 오후 10시 15분 이후 신고가 급하게 늘었는데 경찰은 11건 중에 네 건에 대해서만 사고 현장에 출동했다고 한다. 해산을 시키려 애썼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여력이 없었고 근무 보고와 지휘 체계는 부실했다. 이태원 참사 당일 야간 당직 책임자로서 서울경찰청 치안종합상황실 상황관리관으로 근무한 류미진 경찰청 총경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고 한다. 상황실에 있어야 했던 류미진 경찰청 총경은 40분 동안 자리를 비우고 뭘 했을까. 휴가 중이었던 윤희근 경찰청장은 부재중 통화를 무시하고 자고 있었다고 한다.
서울시청이나 용산구청에서 안전사고에 대비한 사전 대책은 물론 당일 현장관리 및 통제에도 나서지 않으면서 피해가 커진 것으로 보인다. 주최자가 없으니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치부했던 것이었다. 당시 이태원에 배치된 경찰병력은 137명에 불과했으며 이마저 압사 등의 안전사고 대비가 아닌 불법촬영과 마약범죄 집중 단속을 위한 것이었다. 이임재 용산경찰서장의 늦장 대응도 문제가 되고 있다. 용산경찰서 정보 지휘부는 할로윈 축제 전 안전사고 대비 우려 관련 정보보고서를 묵살하고, 이태원 참사 뒤에는 보고서 삭제와 회유까지 했다.
10월 29일 오후 10시 15분에 119에 사람 10명 정도가 깔려 있다는 내용의 최초 신고가 접수됐다고 한다. 그리고 오후 10시 20분부터 해밀튼호텔 근처 좁은 내리막길 골목에 여러 명이 깔려 있다는 내용의 신고가 이어졌다고 한다. 이에 소방대원은 즉시 사고 현장에 출동했으나 사고 현장 진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구조 작업은 지연됐다고 한다. 사고 현장으로 진입했을 때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킨 상태였으며, 이에 소방당국은 오후 10시 43분부터 대응 1단계를 발령했다. 하지만 10시 15분 이전에도 신고가 접수된 걸로 파악됐다. 최초 신고가 10시 15분에 접수됐다는 건 거짓이었다. 소방당국은 그제야 이전에 접수된 신고는 사실 17건이었지만 사고 현장에서 신고된 건 한 건이고 나머지는 그 인근이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오후 10시 45분에는 구급상황관리센터 재난의료지원팀 출동을 요청했으며, 30분 뒤인 오후 11시 13분부터 대응 2단계를 발령하고, 오후 11시 19분에는 이태원 일대의 할로윈 축제 중단을 요청했다. 이어 오후 11시 50분부터 모든 인력과 장비를 투입하는 소방대응 최고인 3단계를 발령하고, 전국 6개 시·도소방본부 119구급차 142대 투입을 지시했다.
희생자 대부분의 사인은 '질식에 의한 심정지'로 알려졌는데, 이 경우 골든타임은 단 4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골든타임은 이미 한참 지나있었다.
이태원 참사는 예고된 인재였다. 특수본은 책임 규명과 사고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고강도 조사와 압수수색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꼭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코로나19 확산 이후 3년 만에 사회적 거리두기 없는 할로윈 축제에 수만 명이 모일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안전사고에 대한 현장관리 및 통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최소한의 조치도 없었다는 게 한 명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제자리를 걷고 있었다. 왜 아직도 부실한 근무 보고와 지휘 체계를 가지고 기도 안 막히는 초동조치를 할까. 세월호 참사에서 배운 게 없는 걸까.
한남동 주민센터 실종자 접수처에서도, 시청 광장 합동분향소에서도, 이태원 1번 출구 추모공간에서도 자식을 잃은 부모님을 봤다. 소리 내어 우시는데 그 울음이 울음이 아니라 정말 동물의 울부짖음이었다. 그 마음은 감히 이해도 못 하겠더라. 나는 남이 울면 같이 운다. 슬프고 화나는 감정을 조금 덜어내려고 노력했다.
홍콩대에서 미디어의 법과 윤리를 배울 때였다. 교수님이 사진을 하나 띄우셨다. 뼈가 다 보일 만큼 굶주린 수단의 작은 소녀 뒤에 독수리가 노리며 공격할 것만 같은 사진. 사진의 제목은 ‘수단의 굶주린 소녀’. 사진을 찍은 사람은 케빈 카터. 사진은 1993년 3월 26일에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사진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국제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UN 작전 라이프라인 수단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왔으며 UN은 이 지역의 기근과 필요를 알리는 것이 구호단체가 자금을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일단, 그는 하라는 일을 잘 해내서 돈을 벌었다. 수단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에 기부금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는 퓰리처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굶주린 소녀를 구하지 않고 사진 찍을 생각을 했냐는 거센 비난과 비판, 질책을 받기 시작했다. 추후 그의 발언 및 동료들의 증언 등으로 밝혀진 바로는, 소녀의 부모가 구조 캠프에서 잠시 아이와 떨어졌을 때에 마침 뒤쪽에 독수리가 앉았고, 구도를 직감한 그가 몇 발짝 이동하여 사진의 구도를 맞추고 촬영을 한 직후 독수리를 쫓아버렸다고 한다. 오해였지만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 결국 그는 퓰리처상을 받은 해에 자살했다.
기자는 취재를 할 때에 관찰자로만 남아야 하는가?
내가 이 사진 얘기를 왜 꺼냈냐면. 20대 초반의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찍지 않고 아이를 살리겠다고 했었는데 앞으로의 나는 또 모르지만 20대 후반의 나는 최대한 빨리 방송에 나갈 수 있을 정도만 찍고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살릴 것 같다. 그러니까 교수님은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게 아니었다. 둘 다 잘해보라는 거였다. 하지만 정말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대신 나름의 철칙이 있다면, 예를 들어, 이태원 참사로 인해 울부짖는 분을 클로즈업해서 찍지 않았다. 특히 그런 분들을 끝까지 클로즈업한 상태로 팔로우 하시는 영상기자들도 많았는데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좀 정돈된 분께 조심스럽게 인터뷰 요청을 했는데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취재기자한테 눈물을 유도하는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인터뷰 딱 두세 줄 나가는 것에 우는 모습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실종자 접수처에서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뭘 하고 나오셨는지, 어떤 조치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등의 질문을 통해 조금이라도 유의미한 뉴스를 만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