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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Apr 25. 2021

모르는 사람

학교 과제인데 설문조사 하나만 부탁드려요.


지하철역을 나오는데 학생들이 나를 붙잡았다. 주변을 보니 두 팀 정도 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붙잡고 있었다. 얼핏 보니 학생들이 내민 휴대폰에는 색감만 다른 같은 포스터가 여러 장 떠 있었고 '나도 이렇게 설문조사하러 돌아다닐 때가 있었지'라는 생각을 하며 흔쾌히 휴대폰을 받아들고 포스터를 훑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하늘색 색감의 포스터를 고르고 스크롤을 내려보니 이름과 나이와 전화번호를 남기는 공간이 있었고 '엥, 웬 전화번호?'라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지만 그들이 앳된 얼굴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의심은 사라졌다. 나는 그렇게 내 개인 정보를 술술 쓴 후 그들에게 휴대폰을 돌려줬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설문조사 결과 그래프를 보여줬다. 내가 고른 하늘색 색감의 포스터가 월등히 많은 선택을 받았더라. 그들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하늘색 색감의 포스터를 고른 이유가 있다면서 현대인들이 삶 속에서 받는 여러 스트레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본인들은 알고 있다며 나에게 시간을 좀 더 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알아챘다.


아... 사이비구나. 요즘은 전도하는 수법도 참 여러 가지네.


약속을 핑계로 자리를 뜨려고 하자 주님이 치유해 주실 거라며 나를 붙잡았다. 거의 도망치다시피 그들에게서 벗어났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부터 모르는 번호로 계속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번호를 차단하면 또 다른 번호로 집요하게 전화가 왔다. 생각해 보면 정말 어린 친구들이었는데 부모님들은 아시는지, 집에는 들어가는지 걱정이 되더라.


나는 사실 모태 신앙의 기독교 신자다. 기독교인들도 거리에서 믿지 않는 이들을 전도하지만 기독교의 전도와 사이비 종교의 전도는 매우 다르다. 다들 알다시피 사이비 종교의 전도는 말로 살살 꼬시는 형태라 나는 원래 바로 알아채는 편이었다. 그런데 요즘엔 그 수법이 너무나 다양해져서 나조차도 그들의 이야기를 몇십 분을 들어준 후에야 알아챘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그들을 더 경계하게 됐다. 그런데 얼마 전, 회사 근처에서 병원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아주머니가 계속 내 눈치를 보시며 나를 따라오는 걸 느꼈다. 아, 또 걸렸구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날 계속 따라오셨다.


아가씨, 내가 말해줘야 될 거 같아서... 뒤에 단추 하나가 풀렸어요.


내 착각이었다. 그날 뒤에 단추가 네 개나 달린 흰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그중 하나가 풀렸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서 잠그려고 손을 뻗었는데 위로도, 아래로도 단추가 손에 잘 닫지 않았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아가씨, 손이 안 닿는 거 같은데 괜찮으면 내가 해줄게요'라고 하시며 단추를 잠가주셨다. 거듭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린 뒤 나는 다시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보니 아주머니는 심지어 아까 내가 나온 병원 쪽으로 다시 돌아가고 계셨다.



모르는 사람.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모르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배운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 말고도 세상에 조심해야 할 사람들은 많다는 걸 나도 안다. 그런데 세상엔 따뜻한 사람들도 많다. 버스에서 울고 있던 나에게 조용히 휴지를 건넸던 언니도, 부둣가에 찾아가 한참을 서성이다 주저앉아 허공을 응시하던 시절 나에게 힘내라고 원하면 낚시를 가르쳐주겠다던 아저씨도 다들 모르지만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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