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공 여객기 추락 참사로 참사 다음날 현장에 투입되었다. 사실 179명의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 참혹한 사고 현장, 슬픔, 그리움, 분노로 가득 찬 유가족들의 절절한 눈물과 탄성, 희생자들을 기리고 유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하기 위해 길게 늘어진 엄숙한 추모 행렬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 모두가 섞인 현실 같지 않은 현실 속에서 어떤 상황을 마주하게 될지 몰라 두려운 마음으로 현장에 투입되었다.
이런 참사를 또 취재하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웃을 수 없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잠깐 흘리는 웃음이 누군가의 마음을 더 다치게 할까 봐. 나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까 봐 조심하고 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으로 취재하려 할 수밖에 없었다. 참사 둘째 날, 투입된 지 한 시간도 채 안 지나서, 몇백 명의 유가족을 상대로 하는 브리핑이 종료되고, 유가족들 중 한 분에게 왜 울고 계신 분들을 찍느냐는 항의를 받았다. 바로 죄송하다고 하고 빠졌다. 울고 계신 분들은 찍은 적도, 찍고 있지도, 찍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무조건 죄송하다고 했다. 그 이후, 나는 앞에 절대 가지 않았다. 사실 갈 수가 없었다. 카메라가 앞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할 거라는 뒤늦은 깨달음에 대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이태원 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제주항공 여객기 추락 참사로 울고 계신 분들의 앞모습을 찍지 않았다. 모자이크가 될 테지만 애초에 앞모습을 찍지 않는 게 맞다. 찍어도 뒷모습이나 손에 담긴 몸의 떨림만을 찍었다. 무안공항에 유가족 대기소가 있고 유가족들이 텐트에서 생활하고 계신데 거기서도 핫팩, 담요, 도시락, 물, 칫솔 같은 물품들 위주로 찍었다.
그림을 넘길 때, 모자이크나 음성 변조 요청에 대해 철저하게 신경 썼다. 하나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체크하고 또 체크했다. 고인의 성함도, 나이도, 얼굴도, 가족 관계도, 그 어느 것도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재난보도 원칙에 의한 것이었다. 넘긴 그림이 타사와 공유되기도 하기 때문에 착오가 없도록 처음부터 철저하게 신경 썼다.
유가족이 원치 않는 내부 취재도 장례식장이나 추모공간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꾸역꾸역 강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취재를 더 하지 않았다. 전체 풀 그림으로 충분했다. 추모 행렬을 담은 외부 취재를 하긴 했으나 그것마저도 길게 하지 않았다.
#무안공항 1층 합동분향소 전체 풀#
유가족 대표단, 기관장, 일반 유가족, 시민 순으로 조문
유가족 대표단, 기관장 조문: 영상2, 사진2
*얼굴 촬영 가능
일반 유가족, 시민 조문: 영상1, 사진1
*뒷모습과 손 클로즈업 가능, 옆모습과 앞모습 절대 불가
*조문하는 동안 위패와 사진은 블러 처리 원칙, 클로즈업 자제
*라이브는 합동분향소 배경 불가
하지만 신속하고 정확한 취재를 해야 하는 순간들도 있었다. 유가족을 상대로 한 여러 기관의 브리핑이 있었고 가끔은 언론을 상대로 한 유가족의 브리핑도 있었는데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장이다 보니 갑작스럽게 브리핑을 한다고 해도 현장 연결을 할 수 있게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다. 무안공항 사무실들이 압수수색에 들어갔을 때도 그랬다. 압수수색 관계자든 누구든 몸싸움을 해야 할 때는 해서라도 꼭 전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꼭 전하려고 노력했다. 유가족을 위해서라도.
스물두 살 이 일을 하기 시작해 연합에서의 6년을 지나 서른 살이 된 내가 아직 이 일을 열심히, 잘 하려 해서 다행이다. 연말, 연초를 계엄, 탄핵, 제주항공 여객기 추락 참사로 바쁘고 춥게 보냈다. 바쁘고 추운 연말, 연초였지만 내가 내 몫을 더 잘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아쉬운 마음도, 또 죄송한 마음도 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