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이 Apr 07. 2021

미워하는 마음

나는 친할머니를 정말 많이 좋아했다. 나는 할머니 옆에 붙어 다니는 껌딱지였다. 할머니는 나와 잘 놀아주셨다.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셨다. 첫 책가방, 첫 책상, 첫 피아노, 첫 컴퓨터 등등 다 할머니가 사주셨다. 다섯 살 때였나, 첫 파마도 할머니가 미용실에 데려가서 해주셨다. 덕분에 평생 악성 곱슬로 살아가고 있지만 다 좋다. 난 할머니 옆에서 할머니랑 자는 걸 좋아했다. 할머니 냄새며 온기며... 내가 기억하고 사는 게 별로 없는데 그거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도 사진을 보면 그때로 돌아간 것 같다. 할머니랑 나는 생긴 것도 닮았다. 우리는 웃을 때 잇몸이 보인다. 나중에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인중이 조금 짧아서 그런 거 같다. 사실 할머니는 호랑이처럼 아주 무섭게 변할 때도 있었다. 혼날 때는 아주 눈물을 쏙 빼야 했다. 아빠가 멀리 계셔서 할머니가 잘못된 건 바로잡아주시고 싶으셨던 거 같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땐 고집이 더 셌다.


주변에 항상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셨던 할머니는 나에게 사랑을 알려주셨다. 할머니는 손이 크셔서 항상 음식을 아주 많이 하시고는 주변에 가져다 주셨다. 교회 권사님이셨는데 할머니는 한 분 한 분 잘 챙기셨다. 그렇게 나누시고 베푸실 때 행복해 보이셨다. 그런데 하늘은 천사 같은 할머니를 무심히도 빨리 데려가셨다. 간단한 수술을 하러 수술대에 오르셨다가 의료사고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사실 그날, 나는 꿈을 꿨었다. 흰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랑 내가 손을 잡고 넓은 초원을 즐겁게 달리고 있었는데 흰색 문이 보였다. 할머니가 문을 여시더니 내 손을 놓고 혼자 들어가셨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친할아버지는 군인이셨다. 엄청 가부장적이셨다. 상이  차려지면 앉으시고  드신 후에는 상을 치우는 가족을 뒤로하고 다시 티비 앞으로 가셨다. 청소하시는   번도  적이 없다. 집안일은  할머니 몫이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실  없으셨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재혼을 하셨다. 그래도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미웠다.  할머니도 정말 미웠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께 엄청 다정하셨다. 할머니 살아 계실 때는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래서     미웠다. 내가 어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12년 후, 내가 홍콩에 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미움은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바해서 번 돈으로 선물 한 번 사드리지 못했는데. 밥도 딱 한 번밖에 사드리지 못했는데. 그것마저도 잘 드시지 못할 때였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후회했다. 좋았던 기억만 생각났다. 보고 싶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유산으로 잘 사실 줄 알았던 새 할머니가 할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몇 달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충격 그 자체였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거, 물론 대부분 이유 없이 미워하진 않지만 그 이유조차 어떻게 생각해 보면 내 입장에서 내가 만들어 낸 거라는 거. 다 각자의 사정이 있을 거라는 거. 난 그 이후로 누구를 함부로 미워할 수가 없다.

작가의 이전글 <라일락> 첫사랑, 젊은 날의 추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