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은 할 줄 알아요? 조금씩만 할 줄 알아요!
내가 가지고 있는 몇 개의 옅은 재능 중 첫 재능은 그림이었다. 어렸을 적 [디지몬 어드벤처]라는 만화를 재밌게 보고 집 근처 문방구에서 캐릭터들이 그려진 카드를 사 모으곤 했다. 그리고 스케치북을 오려 그 캐릭터를 따라 그렸다. 나름 만족스러웠다. 친구들도 그랬나 보다. 뭐에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500원을 주며 내 그림을 사 갔으니까.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는 난을 그리기를 했는데 선과 구도가 또래와는 다르다는 칭찬을 받고 나는 내 재능을 확신했다. 그리기 대회에도 몇 번 나간 적이 있다. 그러나 난 어디 입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기대는 점점 커졌지만 현실이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우리는 ‘현타(현자 타임)’를 느낀다. 노력과 열정을 쏟고 난 후 오는 거부할 수 없는 회의감과 비관적인 생각이 불어오는 현자 타임은 내가 꼭 잡고 있던 펜을 놓게 만들었다. 더 깊이 우물을 팔 수 있음에도 난 다른 우물을 파기로 마음먹었다.
우물에 관련된 옛이야기가 하나 있다. 고을에 우물이 메말라 가는 걸 걱정한 원님은 새 우물을 파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겠다 한다. 두 청년이 나서는데 한 청년은 우물을 파다가 조금만 가능성이 안 보여도 다른 곳으로 가 다시 우물을 팠고 다른 청년은 자리 잡은 한 곳에 진득하게 붙어 계속 우물을 팠다. 결국 한 자리를 고집하던 청년의 자리에서 물이 샘솟았고 상은 끈기가 있었던 청년에게 주어졌다. 이 청년이 정말 끈기가 있었기 때문에 상을 얻은 것일까 아니면 운이 좋았던 것일까? 이야기의 메시지를 떠나서 나는 여러 우물을 판 청년에 더 마음이 간다. 여러 우물을 파 보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인 것 같은데 현명한 사람들은 한 우물을 판 청년의 손을 들어준다. 그렇다면 나는 틀린 것일까?
두 번째 재능은 음악이었다. 중학교 때 우연한 기회로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렇게 여러 악기와 사람이 모여 만드는 음악의 맛을 알았다. 드럼이 물론 독립적인 악기는 아니지만 (드럼 소리만 혼자 있으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내가 멋진 음악을 만드는 데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 이후로 자연스럽게 일렉 기타, 베이스 기타, 그리고 피아노를 조금씩 배우게 되었다. 드럼을 쳐서 박자감이 연습이 된 건지, 내가 재능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금세 습득했고 간단한 연주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전문가들과 함께 어울려 연주를 하면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느끼게 된다. 기본적인 코드와 주법으로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자작곡도 한 번씩 만들어보곤 했다. 동생에게 선물로 받은 작곡에 필요한 장비 하나를 선물로 받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작곡을 해보고 싶었다. 하루는 그림을 그리다가 글을 쓰다가 어느 날은 작곡을 하고 창작활동을 해봤다. 그러다 보니 쏟는 에너지와 시간이 분산이 되다 보니 실력은 더디게 늘고 혼자 독학을 하다 보니 한계의 벽에 부딪치게 됐다. 내가 기대하는 것만큼 결과물은 나오질 않고 자신감을 잃는다. 한계를 실감하고 느껴지는 참담함에 모아 온 장비들에는 먼지가 쌓여만 갔다.
이런 실험이 있었다. 벼룩은 자신의 몸의 300배나 높이 뛰어오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벼룩을 병 안에 넣고 밖에 못 나가게 했다. 좁은 병 안에 갇힌 벼룩은 뛰어도 천장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곧 천장에 부딪히지 않는 높이를 발견하고 그만큼만 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다시 벼룩을 병 밖으로 탈출시켜도 벼룩은 병 속만큼의 높이만 뛴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다시 자기 높이를 회복한다 해도 한동안이라도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고 자신의 능력이 제한된다는 건 신기하다. 이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이 인용된다. 실패에 굴복해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긋지 말라는 메시지다. 일단 벼룩에 비유하는 것이 기분이 나쁜 건 둘째 쳐도 이 이야기를 인용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말을 너무 쉽게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말하는 건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 정도의 스케일이 아닌 스스로의 실패를 경험했을 때의 참담함과 속상함을 또다시 무언가를 했을 때 느낄 가봐 걱정하는 정도이다. 군인들이나 소방관들 만큼의 충격은 아니겠지만 이 케이스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큰 심리적인 압박일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이 지속되다 보면 결국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포기하는 결심을 하게 될지 모른다.
앞서 말한 것들 외에도 연기가 하고 싶어 연기를 배우고 그다음에는 순서대로 연출, 뮤지컬, 영화, 화학, 가구, 프로그래밍 등 이렇게 다양한 영역에 발을 담갔다가 나의 한계가 느껴진다거나 다른 것이 더 가능성이 보인다 생각이 들어 여러 우물을 파왔다. 그 어느 것 하나 진득하게 한 적 없다. 모두 하나같이 얕은 지식과 기술이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누군가는 이런 것도 할 줄 아냐며 부러워한다. 당연히 기분 좋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하기도 하다. 내가 정말 잘하는 게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할 수 있을까?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지? 이런 고민도 한다. 얕지만 넓고 넓지만 얕은 재능. 재능이라기보다는 무능에 가까운 걸까?
글/그림 오웬 플리크 (O.N.FLEEK)
Instagram @o.n.fleek_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