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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웬 플리크 Jun 11. 2021

얕고 넓은 재능 #2

내가 주인공인줄 알았지뭐야

        내가 뮤지컬에 빠지게 된 계기는 처음 직관해본 캣츠(Cats) 뮤지컬이었다. 가장 멋있어 보이던 럼텀 터거가 한 손으로 꼬리를 돌리며 노래를 부를 때 나는 발 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저 사람처럼, 옆에서 함께 춤추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처럼 무대에 서고 싶다고. 나도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그 후 어느 예술고등학교에서 진행하는 뮤지컬 스쿨에 오디션을 본 적 있다. 나름 경쟁률이 있었지만 몇 달간의 독학과 연습으로 나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세 번째 재능이었달까). 그때 들었던 애정 표현에 서투셨던 아버지의 자랑스럽다는 칭찬은 지금 생각해봐도 코가 찡해진다. 가족들과 친구들의 칭찬과 응원 속에서 나의 자신감은 점점 높아졌다.


    기대를 품고 들어간 연습실에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수십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느꼈다. 그들은 반짝반짝했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이쁘고 심지어 그 당시 무대에도 올랐거나 방송에도 나왔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수업 중에 또래 친구들과 함께 연습하고 어울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과 나의 차이를 극심하게 느낀 때는 노래 수업이었다. 아직도 그 긴장감과 떨림이 기억난다. 오디션 당시 짜인 연기, 즉흥 연기, 특기, 그리고 노래로 시험을 보는데 나는 노래에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준비해서 갔다. 베란다에서 집에 가족들이 최대한 없을 때를 골라서 혼자 연습하곤 했다. 어머니가 이따금 조언을 해주셨고 나름 열심히 준비를 했다. 심사위원들 앞에 선 나는 기대를 품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나는 첫 5 글자, “지금 이 순간”까지 부르는 순간, 음악 선생님이 턱을 괴며 다른 손으로 쥔 펜을 테이블에 기분 나쁘게 두드려 나를 멈춰 한 소 절도 부르지도 못했다 (이후에 연출 선생님께 물어보니 그분과 연기 선생님이 내 재치와 연기가 마음에 들어 합격을 주셨다 했다.) 합격 후 첫 음악 수업 때 ‘여기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사람들이 있지만 반가워요’라는 말은 괜히 내 마음에 꽂혔다. 그 이후로도 그 선생님은 내게 눈길 한번 주시지 않으셨다. 1년 동안 수업과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의 갈라쇼를 무사히 마치고 졸업 증서와 함께 무사히 프로그램은 마무리가 됐지만 나는 처음 재능의 차이를 실감했다. 주인공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처음의 기대감과는 달리 악역을 자처하지 않으면 조연으로도 참여하기 힘든 현실을 어린 나이에 또 느꼈고 나는 다시 다른 우물을 찾게 되었다.


    스포트라이트(spot light)는 관객이 무대 위 배우를 잘 볼 수 있고 연극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지만 배우의 입장에서는 조금 다르다. 밝은 빛에 어두운 관객석이 보이지 않아 연기에 몰입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나의 인생은 조명에 의해 눈이 가려져 현실보다는 상상과 감성에 치우쳐지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나는 샤워와 목욕을 오래 할 때가 많은데 이때는 단순히 따뜻함과 혼자 있는 평안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내 머릿속에서 내 마음대로 그려지는 나의 백일몽(daydream)에 빠져 있다. 나는 백일몽의 영문표기인 daydream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잘 때가 아닌 의식이 있을 때 낮에 꾸는 꿈. 백일몽이 한국 사전에 검색하면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으로 표현되지만 daydream이라고 하면 영어권에서는 언제든 기분 좋은 나의 상상을 하는 것 쪽에 더 가깝다. Daydream에 빠져 있을 때 나는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밝게 빛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나만의 세상을 그려나가는 세상. 그리고 이 시간이 끝나면 다시 돌아온다. 물론 때로는 빛나지 않는 진짜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는 하지만 나는 메스 미디어로 통해 보이는 반짝반짝하는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슴 한편에 품고 산다. 내가 하는 것은 백일몽이 아닌 daydreaming이라고 나를 달래면서.


    노란 조명으로 빛나는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는 얼굴의 이목구비를 극대화시켜주는 진한 화장을 지우고 휘황찬란한 옷에서 무채색의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하얀 불이 밝게 모든 구석구석을 비추는 전철에 몸을 맡긴다. 무대 밖 조명은 그를 비추는 게 아니라 어두워 눈에 보이지 않던 현실을 보이게 해주는 용도이다. 이렇듯 나나 내 주변 가까운 이들 외의 세상에게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 괴리감과 이질감에 더 빛나는 것들에 집착하게 된다. 대세라고 하는 것들, 인기 스타가 하는 것을 따라 해 보거나 빛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방송을 관음증 걸린 사람처럼 보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방송에서 연예인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은 불티나게 팔리는 것 같다. 그들이 쓰는 물건들을 가지면 나도 조금은 특별해지지 않을까 하는 무의식 속의 기대감으로 물건을 사면 처음은 그리 느끼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할 때, 그 때 실망했던 경험해 본 적은 없는가?



    2016년에 개봉한 영화 [럭키]의 주연이 누군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것이다. 바로 만년 조연이었던 배우 유해진이다. 젊고 잘생기거나 이쁘기로 유명한 배우들이 (연기 잘하는 건 기본이지만) 주연 자리를 꿰차는 와중에 당당하게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이에 환호했다. 나는 주연과 조연의 기준이 외모가 아닌 그 영화의 본질에 맞물리는 알맞은 개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주인공인 유해진은 영화 속에서 다른 젊은 배우들이 돋보이도록 조연처럼 도와주는 역할도 한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유해진이 조연이고 이준과 임지연 역이 주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볼 관점은 조연과 주연을 나누는 의미가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점을 던질 수 있겠다. 주인공과 아닌 사람을 나눌 필요가 있을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독백을 하는 장면은 지나가는 한 순간일 뿐이다. 본질은 연극 무대 전체이다.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은 존재할 뿐이다.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온 무대를 더 밝게 비춰주는 사람의 가장 좋은 모델은 유재석이 아닐까 싶다. 그는 모두가 유느님을 찬양하지만 나오는 동료들과 게스트들이 돋보일 수 있도록 노력을 하는 사람이다. 그림의 한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자리까지 올라가지 않았을까 나는 생각한다. 전 국민이 그리워하는 MBC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초창기까지의 유재석은 지금처럼 주목을 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유해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주목을 받을 때는 주변에 스타이던 아니던 동료들이나 게스트들이 함께 있을 때다. 무한도전이나 런닝맨이 오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닌 사람도 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해있는 곳이 내가 있는 곳이 밝게 빛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인 것 같다. 내가 밟고 있는 무대가 빛날수록 나도 더 밝고 소중할 것이라 믿는다. 


글/그림 오웬 플리크 (O.N.FLEEK)

Instagram @o.n.fleek_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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