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으로 출근하는 여자

오늘도 나는 서촌으로 출근한다

by 하하

계절이 이동하고 있다. 가을이 길어 이러다 겨울을 잊으면 어쩌나 했는데 이제는 제법 코끝이 시리다. 창을 열어 차가운 공기를 구석구석 채우고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아 오롯이 내 차지가 된 이 공간을 즐기는 중이다. 지난주 차회에서 향이 좋아 얻어온 차를 내리는 일로 오늘 아침을 시작한다. 아침을 느긋하게 시작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조금은 여유로운 사람이 된 거 같아 기분이 좋다. 햇살의 변화를 누리고 계절의 이동을 느끼는 요즘 일상이 사실 그리 오래된 건 아니다.

내 나이 쉰,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싶어 은퇴를 선택했다.

대학 졸업 후 한 해도 쉬지 않고 같은 직장을 다녔다. 낮 시간의 햇살과 자유를 갈구하며 주말을 기다리는 일상에 지쳐 갈 즈음 사춘기가 세게 왔다. 남들은 갱년기라 하지만 분명 사춘기라고 우겨본다. 장남 같은 장녀로 부모님의 기대가 무거워 사춘기를 건너 뛰면서부터 나의 삶이 고단해졌기에 이참에 확실하게 사춘기라 명명하고 슬기롭게 극복하고 싶다. 남들의 시선과 평가가 중요했던 나는 되돌아볼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참 부단히도 애쓰며 살았다. 머릿속 테러리스트로, 내 마음 들키지 않게 꽁꽁 숨긴 채 그 시간을 견디느라 어른이 되기는커녕 아직도 질풍노도 그 자체다. 항상 멋진 어른을 꿈꾸었는데, 그래서 이 나이쯤엔 스스로 알아서 성숙한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하늘의 이치를 안다는 이 나이에 이치는 고작 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내 마음 나도 몰라 방황하는 꼴이라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좀 더디게 온 나의 사춘기를 기초부터 탄탄하게 공부할 생각이다.

의욕만 앞서 무리한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나를 구겨 넣은 채 죄책감에 반성만 하던 나의 일상은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내세워 허송세월로 바쁘다. 조급하던 성격과 현실적인 욕심이 한순간에 짜잔 하고 드라마틱하게 변하진 않겠지만 오늘이라는 시간을 여유 있게 쓸 수 있어 참 좋다

달라진 나의 일상과 함께 친해진 동네가 바로 서촌이다. 이제는 일터가 아닌 서촌으로 출근한다. 오전에 운동을 마치면 을지로부터 서촌까지 걷는다. 을지로~시청~광화문~경복궁~서촌, 이 아름다운 코스가 나의 출근길이다. 매일매일 마주치는 나무, 사람, 구름, 이 모든 걸 나는 사랑한다. 경복궁 돌담 은행나무가 그렇게 이쁜지 올해 처음 알았다. 목적 없이 등 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그 길을 걸으니 ‘이게 행복이지’싶더라. 올가을은 유난히 날이 좋아 매일매일 그 길을 걸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보면 볼수록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더 알고 싶고, 나는 지금 서촌과 연애 중이다. 어떤 날은 나도 이방인 모드로 외국인들 틈에서 커피를 마시며 오고 가는 사람들을 한동안 관찰한다. 또 어떤 날은 햇살이 너무 좋아 테라스에서 샴페인 한잔 시켜 놓고 사춘기 그때의 나이로 돌아가 겉멋 작렬 호사를 부린다.

골목골목 누비며 어제와 다른 오늘을 관찰하고 서촌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행사도 참여하며 관심사를 넓히는 중이다.

적당히 호기심도 있고 문화적 욕구도 많은 나지만 착각이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알면 알수록 공부할게 많아 설레는 요즘이다. 사춘기가 분명한데 내 기억력은 갱년기를 겪는 중이다. 하지만 나에겐 성실과 꾸준함이라는 무기가 있다. 이렇게 낮 시간 혼자 충분히 나의 시간을 만끽하다 보니 좋은 변화도 있다. 타인에게 기다려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마음도 말도 상냥해져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성장한 거 같아 스스로 토닥토닥한다. 결핍이 줄어든 그 자리에 따뜻한 마음이 생긴 걸까? 바빠서 허덕 일 때는 누가 내 이름만 불러도 바쁘다고 소리쳤는데 요즘은 가끔 주위를 둘러보며 내 도움이 혹시 필요한지 살필 때가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기특한 변화이긴 하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 변화는 아직 나만의 평가다. 가족들은 때때로 “누가?”라는 의아한 표정을 짓곤 하니, 갈 길이 멀다. 오늘도 나는 무엇이든 공부할 마음을 챙겨 서촌으로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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