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inama]
오랜만에 주말 오전부터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더위를 핑계 삼아 한동안 주말에는 집에만 틀어박혀 맘껏 게으름을 피워댔으나 이번 주말은 엄마와의 호캉스가 계획되어 있다.
집을 나온 지 벌써 5년이 다 된 나는 고작 2시간 거리의 집을 멀다는 핑계로 거의 발걸음 하지 않는다.
하지만 뜸한 발걸음에 비해 엄마와는 자주 만나는데, 좋은 영화가 나오거나 엄마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괜찮은 공연이 있거나 가볼 만한 장소를 발견할 때마다 엄마를 불러내기 때문이다.
문화생활을 좋아하는 취향 자체가 엄마의 영향으로 형성되었기에 엄마와의 문화생활은 취향이 잘 맞는 친구와 함께하는 취미생활 같은 느낌이 있다.
같은 작품을 보고 생각을 나누고 분석해보고 하는 시간은 꽤 즐겁고 유익하다.
그렇지만 그보다 엄마에게 좋은 영화를, 멋진 공연을, 새로운 곳을 경험하게 해 주고픈 마음이 컸다.
아마 엄마가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했던 이야기를 듣고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평생을 시골에서 가족들의 뒷바라지만 하며 살아왔던 소설 속 ‘엄마’가 딸 덕분에 처음으로 데모가 펼쳐지는 광화문을 가본 뒤 딸에게 네 덕에 처음으로 광장을 가봤다며 고마워했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광장이란 게 새로운 곳, 새로운 경험을 상징하는데 그게 인상 깊었다고.
엄마는 오랜 시간 주부로 살아왔다.
세상에서 잠시 눈 돌려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을 지키는 동안 엄마는 어느새 세상에서 뒤처졌고, 훨씬 좁아진 세상밖에는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썩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생활과 고된 시집살이와 넉넉지 못한 형편이 온 사방에서 엄마의 세상을 더 좁혀왔다.
어려운 형편에 정신없이 살다 보니 연락하고 지내는 학창 시절 친구가 하나도 없다며, 내가 엄마의 유일한 친구라고 엄마는 종종 쓸쓸히 말하곤 했다.
나는 새삼 내가 살고 있는,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엄마의 세상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광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엄마를 광장으로 이끄는 딸이자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날 이후 나는 엄마를 광장으로 인도하겠다는 소소한 사명감으로 시시콜콜한 요즘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전했다.
어떤 신작 영화가 나왔고 해외에서도 상을 휩쓸고 있으니 꼭 봐야 한다고, 우리가 좋아하는 소설 원작의 뮤지컬이 나왔으니 보러 가자고, 요즘 다들 호캉스 호캉스 하니 우리도 한 번쯤 호캉스를 가봐야 한다고 엄마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
사실 엄마 덕에 나도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새로운 곳을 가보게 되기도 했다.
엄마에게 넓은 광장을 보여주려다 보니 내 광장까지도 넓어졌다.
제주여행을 가고, 독립서점 투어를 하고, 전시 구경을 하고, 엄마는 기회가 없어 가보지 못한 바에도 함께 가보고.
그렇게 다니기 시작한 게 벌써 몇 년이 되어 엄마는 그런 기억들을 한편에 차곡차곡 간직해 두고는 즐거웠던 추억들을 곱씹는다.
상당히 팔불출인 편인 엄마는 지인들을 만나거나 가끔 친척 식구들과 모일 때면 빼놓지 않고 그런 일들을 자랑하고는 한다.
엄마가 계속 자랑할 수 있게 나는 계속 좋은 추억들을 업데이트한다.
그런 나날들 중 하루인 오늘도, 엄마와 브런치를 먹고 종각역의 한 호텔에 와 있다.
엄마는 옆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다.
사실 10초 정도 책을 읽다가 10초 정도 졸다가를 반복하고 있어서 정확하게 뭘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딱히 무엇도 열심히 하지 않는 게 호캉스의 목적이니까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도 처음 가 볼 식당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싶다.
엄마의 광장이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