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inama]
가끔, 옛 앨범을 들춰보듯이 옛 글들을 들춰본다.
앨범에는 나의 옛 모습이, 글들에는 나의 옛 마음이 담겨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데 괜히 욕심이 생기니 쓸 만한 이야기는 잘 떠오르지 않고, 예전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써댔던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썼던 건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아서, 오랜만에 옛 글들을 찾았다.
종종 찾아보는 20대 때 사진 속 나는, 고작 몇 년 전인데도 지금보다 훨씬 풋풋하고 생기 넘쳐 보였는데.
마음속은 뭐가 그렇게 서럽고 힘들었는지 글들의 제목만 훑어봐도 그때의 기분과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때의 글들은 세상 온갖 것에 대한 원망과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연민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때도 즐겁고 행복한 일이 없었을 리 없건만, 글만 보면 나의 20대는 불안하고 외롭고 절망적인, 기쁨과 희망 따위는 도무지 없던 시절인 것만 같다.
재밌는 건 그러다가 스물아홉 즈음이 되어서는 또 즐겁고 가벼운 글만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인생이 스물아홉을 기점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여 괴로움 하나 없이 즐거운 일들만 가득했을 리도 없고, 실제로도 그렇지 않지만 아무튼 내 글의 역사를 훑어보면 그래 보인다.
절망의 글에서 즐거움의 글로 전환하게 된 기점 즈음의 어느 글 중 “조촐한 불행”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어느 날 썼던 글들을 되짚어보고는 매일 아프고 힘든 이야기만 늘어놓는 스스로가 한심해 보였었나 보다.
대단치도 않은 조촐한 불행 가지고 엄살을 떤다며 자책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시점부터 의도적으로 즐거운 일들만 기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우울할 때만 글을 썼는데, 요즘은 우울하지 않을 때만 글을 쓴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겠지만 내게도 서른이면 굉장히 어른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물론 서른에 인생의 완성에 다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완성의 기초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방향성과 그에 대한 확신쯤은 설 것이라고 막연히 믿었다.
예수는 서른에 사역을 시작했고 부처는 스물아홉에 출가했다. 공자는 서른이면 뜻을 세운다고 했고 차라투스트라는 서른에 산에서 내려왔다.
그런 비범한 무언가를 이룰 것이라 기대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내게 서른은 뭐랄까, 자연히 세월이 흐르면 얻어지는 나이의 수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격을 갖춰졌을 때 주어지는 타이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서른에 다다랐을 때, 딱히 이룬 것도 없고 인생의 뜻을 세우기는커녕 아직도 뭘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내가, 여전히 불안하고 막막한 인생을 살고 있는 내가, 자격도 안 되는 나까짓게 감히 서른이라니-하고 생각했었다.
별 볼 일 없이 서른이 되었지만, 그래도 예전의 나를 돌아보니 지금의 나는 힘든 시간은 어차피 금방 지나가리라는 것을, 고민과 우울로 시간을 낭비해봐야 해결되는 건 없다는 것을, 그렇게 힘들다고 징징대며 대단한 불행을 감수하는 척 하기에는 감사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만큼.
이제 징징댈 나이는 지났으니 쿨하고 여유로워 보여야 한다고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며 지친 마음들은 외면해 버리고, 미처 아물지 못한 내 상처에게 별 것 아니니 아프다 하지 말라며 스스로에게 무례해질 만큼.
서른 즈음의 나는 딱 그만큼 어른이 된 것 같다.
지나온 자취들을 되짚으며 안 좋은 일이 있는 날은 안 좋았던 이야기를, 좋은 일이 있는 날엔 좋았던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적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만큼 조금 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모든 날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여전히 내가 품어왔던 서른의 자격에 한참 못 미치지만, 어쨌든 이만큼이 나의 서른이다.
‘감히’의 정확한 사전적 의미를 찾아본다.
‘두려움이나 송구함을 무릅쓰고’
두려움이나 송구함을 무릅쓰고 나는 감히, 서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