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꽃고무신 신던 소녀가 동생들의 엄마가 되기까지
우리 집 가정 형편으로는 중학교에 갈 수가 있었어. 우리 엄마는 나를 보낼라 해도 우리 아버지가 양반에 구식이어 갖고 딸들은 갈치면 안 된다 해서 중학교에 안 보냈지.
근데 그때 광주에서 엄청 부자로 산 이모가 있었어. 그 이모 집을 엄마 따라서 언제 한 번 간 적이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어떻게든 중학교에 가고 싶어 갖고, 졸업하고 광주 이모 집으로 혼자 올라왔어. 아버지한테는 몰래 이모 집 잠깐 갔다 온다고 했지.
내 생각으로는 광주로 올라가서 공장이라도 댕기면서 중학교 댕겨 볼라고 했는디, 그때만 해도 고등학교 다니면서 일할 데는 찾을 수 있지만, 중학생은 학교 댕기면서 어디 일할 데도 없어. 그래갖고 이모가 “어른들 허락 없이 이렇게 어찌고 다닐라고… 부모님 허락받고 나서 다음에라도 학교 다닐 수 있으니까 그냥 집에 가거라” 그랬제.
모든 것이 무너진 기분이었어. 분하고 억울해서 아주 미칠라 했어, 아주… 그때는 교복이 유난히 하얀 카라에다가 세라복(세일러복, 하얀 깃이 달린 여학생 교복)에다 멋져부러 아조. 누가 중학교 교복 입고 다니면 ‘내가 저 교복 한 번만 입고 죽었으면…’ 그렇게 한을 품었지.
아버지가 워낙 엄해서 뭐라고 말해 볼 엄두를 못 내. 지금 시대라면 말대꾸를 하고 기어이 이기제. 나는 공부를 해서 남다른 삶을 살고 싶었어. 비록 중학교만 나오더라도 고등학교, 대학 나온 사람들처럼 공무원을 하던지 선생을 하던지, 여튼 뭔가 한 가지를 꼭 해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리 돼 부렀지…….
그 시절엔 국민학교도 안 간 사람도 많앴어.
작은 집 동생은 나보다 한 살 덜 먹었는디, 학교 발을 안 디뎌봤어. 동생들이 그렇게 많은께, 동생들을 봐줘야 부모가 농사일을 할 수 있다 보니 학교 갈 수가 없었어. 뒤에 그 동생하고 이야기를 한 번 해보니까, 내가 가방 들고 학교 가는 거 보면 저도 죽어불고 싶었다고 그래.
그 말을 듣고 나니까 ‘그래도 나는 학교를 나왔으니까 그래도 나는 낫지’ 하고 맘을 접게 되드라고. 학교 포기하고 집에 와서부터는 대종손으로 시집가서 현모양처로 사는 거, 그것이 꿈이었지.
아주 꿈이 천지 차이로 바뀌었지. 그 시절은 엄마하고 집안일하고 청소하고 밥 해묵고 그것이 우선이여.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바느질이랑 길쌈(실을 내어 옷감을 짜는 모든 일)하는 법, 밥 해묵고 그런 거 다 알려줬어. 여자로서는 그런 일들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들었어.
지금 내가 음식 하는 것도 우리 엄마가 하는 방식대로 하는 거야. 음식 하는 방식 하나하나가 지금도 귀에 삼삼허니(눈앞에 보이는 듯 또렷하니) 남아 있어.
다른 집에서는 여자들도 밖에 나가서 모 심으러 댕기고 나무하러 댕기고 다 했어. 나무한다는 게 산에 가서 낙엽 긁어온다는 거야. 그 낙엽으로 아궁이에다가 불을 때는 거지.
솔잎 떨어진 거를 갈쿠(갈퀴, 마른 풀잎이나 나뭇잎, 검불 등을 긁어모으는 데 사용하는 연장)로 긁은다 해갖고 갈쿠나무라개.
잡목(다른 나무와 함께 섞여서 자라는 여러 가지 나무)이라고 잘잘한 나무는 낫으로라도 빈디(베는데), 이 낙엽은 갈쿠로 긁을 수밖에 없어.
나는 그런 걸 안 해봤어. 양반 집안이라 여자들은 들에 나가면 큰일 날 줄 알고.
어려서부터 길쌈이 재밌었어. 치마 만들고 저고리 만들고, 겨울에는 솜 넣어서 만들고. 베를 짜면 하루에 한 필씩 짜냈어. 옷 만들어가지고 남편 옷 입혀서 내보내는 것, 그것이 최고로 으뜸가는 여자였어.
‘내가 열심히 배워갖고 현모양처로서 아주 제일 위대한 사람이 돼서 시부모님 사랑받고 살아야지’ 하는 각오가 들었어. 어릴 때부터도 왜 그랬는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