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교복 한 번만 입고 죽었으면…

1장 꽃고무신 신던 소녀가 동생들의 엄마가 되기까지

by 이수영

우리 집 가정 형편으로는 중학교에 갈 수가 있었어. 우리 엄마는 나를 보낼라 해도 우리 아버지가 양반에 구식이어 갖고 딸들은 갈치면 안 된다 해서 중학교에 안 보냈지.


근데 그때 광주에서 엄청 부자로 산 이모가 있었어. 그 이모 집을 엄마 따라서 언제 한 번 간 적이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어떻게든 중학교에 가고 싶어 갖고, 졸업하고 광주 이모 집으로 혼자 올라왔어. 아버지한테는 몰래 이모 집 잠깐 갔다 온다고 했지.


내 생각으로는 광주로 올라가서 공장이라도 댕기면서 중학교 댕겨 볼라고 했는디, 그때만 해도 고등학교 다니면서 일할 데는 찾을 수 있지만, 중학생은 학교 댕기면서 어디 일할 데도 없어. 그래갖고 이모가 “어른들 허락 없이 이렇게 어찌고 다닐라고… 부모님 허락받고 나서 다음에라도 학교 다닐 수 있으니까 그냥 집에 가거라” 그랬제.


1957년 제7회 6·25의 날 시민대회에 참석한 여학생들의 교복 / 출처: 국가기록원

모든 것이 무너진 기분이었어. 분하고 억울해서 아주 미칠라 했어, 아주… 그때는 교복이 유난히 하얀 카라에다가 세라복(세일러복, 하얀 깃이 달린 여학생 교복)에다 멋져부러 아조. 누가 중학교 교복 입고 다니면 ‘내가 저 교복 한 번만 입고 죽었으면…’ 그렇게 한을 품었지.


아버지가 워낙 엄해서 뭐라고 말해 볼 엄두를 못 내. 지금 시대라면 말대꾸를 하고 기어이 이기제. 나는 공부를 해서 남다른 삶을 살고 싶었어. 비록 중학교만 나오더라도 고등학교, 대학 나온 사람들처럼 공무원을 하던지 선생을 하던지, 여튼 뭔가 한 가지를 꼭 해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리 돼 부렀지…….



그 시절엔 국민학교도 안 간 사람도 많앴어.

작은 집 동생은 나보다 한 살 덜 먹었는디, 학교 발을 안 디뎌봤어. 동생들이 그렇게 많은께, 동생들을 봐줘야 부모가 농사일을 할 수 있다 보니 학교 갈 수가 없었어. 뒤에 그 동생하고 이야기를 한 번 해보니까, 내가 가방 들고 학교 가는 거 보면 저도 죽어불고 싶었다고 그래.


그 말을 듣고 나니까 ‘그래도 나는 학교를 나왔으니까 그래도 나는 낫지’ 하고 맘을 접게 되드라고. 학교 포기하고 집에 와서부터는 대종손으로 시집가서 현모양처로 사는 거, 그것이 꿈이었지.


아주 꿈이 천지 차이로 바뀌었지. 그 시절은 엄마하고 집안일하고 청소하고 밥 해묵고 그것이 우선이여.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바느질이랑 길쌈(실을 내어 옷감을 짜는 모든 일)하는 법, 밥 해묵고 그런 거 다 알려줬어. 여자로서는 그런 일들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들었어.


지금 내가 음식 하는 것도 우리 엄마가 하는 방식대로 하는 거야. 음식 하는 방식 하나하나가 지금도 귀에 삼삼허니(눈앞에 보이는 듯 또렷하니) 남아 있어.


갈퀴질 /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국립민속박물관

다른 집에서는 여자들도 밖에 나가서 모 심으러 댕기고 나무하러 댕기고 다 했어. 나무한다는 게 산에 가서 낙엽 긁어온다는 거야. 그 낙엽으로 아궁이에다가 불을 때는 거지.


솔잎 떨어진 거를 갈쿠(갈퀴, 마른 풀잎이나 나뭇잎, 검불 등을 긁어모으는 데 사용하는 연장)로 긁은다 해갖고 갈쿠나무라개.

잡목(다른 나무와 함께 섞여서 자라는 여러 가지 나무)이라고 잘잘한 나무는 낫으로라도 빈디(베는데), 이 낙엽은 갈쿠로 긁을 수밖에 없어.

나는 그런 걸 안 해봤어. 양반 집안이라 여자들은 들에 나가면 큰일 날 줄 알고.



베틀질(길쌈) /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어려서부터 길쌈이 재밌었어. 치마 만들고 저고리 만들고, 겨울에는 솜 넣어서 만들고. 베를 짜면 하루에 한 필씩 짜냈어. 옷 만들어가지고 남편 옷 입혀서 내보내는 것, 그것이 최고로 으뜸가는 여자였어.


‘내가 열심히 배워갖고 현모양처로서 아주 제일 위대한 사람이 돼서 시부모님 사랑받고 살아야지’ 하는 각오가 들었어. 어릴 때부터도 왜 그랬는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