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그 시절의 종갓집 시집살이
난 뭣을 하든 간에 도시에 나가도 잘 살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어. 근데 막상 시집가니까 나가들 못하게 해 부러… 시집올 때 했던 말이랑 전적으로 달라져 부렀제. 영산포(나주시 영산포)에 큰 시누가 시집가서 산디, 내가 거그만 가서 언능 안 와도 막 델러 오고 난리여. 전혀 어디를 못 가게 해.
옛날에는 무명옷(길쌈해 만든 천으로 지은 옷)을 입고 산 시대잖아. 근께 당목(두 가닥 이상 실을 꼬아 짠 무명) 만드는 공장이 광주 임동에 있는데, 내 이숙(이모의 남편)이 방직 공장에서 높은 위치에 있었어.
한 시집가서 3년 살다 느그 할아버지하고 나하고 이모 집을 찾아갔어. 내가 이숙한테 “이 사람은 이렇게 고등학교까지 나와갖고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라니 농사일도 못 하겄고, 도시 어디 한 군데 넣어주라”고. 내가 아주 당돌허니 말했어.
그랬더니 “종방*이라는 것은 여자 직원들만 많이 있지, 남자들은 몇 명 사무직이고 그리 안 하믄 노동일 몇 사람뿐”이라고 하대. “전화할 테니까 몇 월 며칠 입사 시험이 있으면 알려줄 테니 그때 올라오라”고 그랬지.
그래갖고 느그 할아버지가 고등학교 동창이랑 같이 시험을 보러 갔어. 근디 그 사람은 떨어지고 할아버지가 딱 합격이 되았다고 서울 본사에서 합격장이 온 거야. 그래서 내 속으로는 얼마나 좋았겄어?
그랬는디 합격했다는 말을 안 하고 시어머니가 아주 초상난 집만이로 울고 있데. "(아들) 못 보낸다고, 느그 없이는 절대 못 산다고." 그 말 듣고 느그 할아버지가 딱 주저앉거 분 거야. 경사 난 것처럼 좋아할 줄 알았는데 초상난 것처럼 그래 부르니까 내가 어쨌겄어…….
글믄 부모들이 저러니까 여기 좀 더 살다가 도시 나갈 계획을 세워 보든지 이런 말이라도 잔 해야 된디, 전혀 말도 없이 벙어리가 되아브러**. 며칠이 지나도 말 한마디 안 하더니, 이제 그 뒤로 못 가겠다고 그래버렸제. (울화를 터뜨리며) 나는 미쳐 불겄어 아주… 밥도 안 들어가고, 오직 그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자식들 낳아서 잘 키우고, 시부모한테 잘 할라는 그 꿈으로 시집을 갔거등. 그런디 180도 달라져부니까…….
그때부터 이제 내 몸에 병이 오기 시작했디야. 약만 있으면 집어 목에다 털어너불겄드라.
세상에, 그 합격장조차 어디 감추고 나를 안 보여줬어. 그때 내가 할아버지가 고집 센 거를 알았어.
그럼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거예요?
그러제. 그때가 기회였제. 내가 할아버지 끌고라도 진작에 광주로 왔제. 시부모를 이기고라도 내가 잘하면 되잖아.
그때도 나이 몇 살 더 먹은 각시들 보면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이기고 한 사람들이 있드만. 나는 어머니 일찍 여의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것 때문에 항상 말 한마디나 몸가짐도 조심할라 했어. 엄마 없이 자라 못 배웠다는 말 안 들을라고… 어쩌든이 시아버지, 시어머니 살아계실 때 내가 이 집을 떠나서 나의 빈자리를 느꼈으면 했어.
* 광주시 북구 임동에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두 회사가 있었다. 70년대 섬유산업의 호황으로, 두 회사는 광주에서 가장 종사자가 많았던 광주 경제력의 버팀목이자 광주·전남을 대표하는 사업장이었다. 큰 사업장이 변변치 않던 시절 두 회사에 입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고 한다.
** 현대에서 이런 표현은 장애인을 비하하는 의미로 인식된다. 그럼에도 이 대목은 화자가 비하를 의도하지 않은 구술이라는 점에서 성찰을 위한 사례 차원에서라도 그대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