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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경 Dec 09. 2023

괜찮아 기다리자 더 좋은 파도가 오잖아

제주도 여행기

11월의 막차를 타고 있던 여행 막바지, 그 추운 날씨에 서핑이 꼭 하고 싶었다. 당장 오늘 해야겠다. 막무가내로 달려간 제주도 가장 남쪽의 중문 색달 해변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파도는 잔잔했지만 내 마음만큼은 그 어떤 파도보다 넘실거렸다. 발 끝이 시려도 파도가 포근하게 덮어주면 또 신이 나서 다음 파도를 기다렸다. 서핑보드 위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살아온 방식, 환경, 말투 모두 다르지만 서로가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던 대화를 했다.

파도를 오래 기다리다 보면 잔잔한 물결 사이에 좋아 보이는 파도 하나가 자신 있게 다가온다. 난 그 파도를 잡으려고 열심히 팔을 휘젓는다. 그때 그가 나를 꼭 잡고 놔주지 않으며 건넸던 한마디가 아직도 떠오른다.

“더 좋은 파도가 올 거야.”  

휘청거리는 인생길에서 중심 한번 잘 잡아보려 해도 나보다 급히 가버리는 파도에 넘어져 버린다. 그럴 때마다 제주도 보랏빛 하늘을 이불 삼아 기다리던 그때가 생각난다.

 

괜찮아 기다리자.

더 좋은 파도가 오잖아.

 

우리 인생에도

크고 작은 파도가 밀려올 때

 

더 날카롭고

더 멋진 파도를 잡기 위해 기다리자.

 

겨울 서핑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모두가 추워서 두꺼운 옷 뒤로 숨을 때, 나만이 맨발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겨울 바다는 따뜻하다. 들어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지만, 물속이 훨씬 따뜻하다. 그래서 찰박찰박 바다로 들어가는 그 첫걸음만 잘 참아내면, 깊은 바다로 들어갈수록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그날, 제주 겨울바다에서의 첫 서핑은 평생 잊지 못할 따뜻함으로 기억한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핀란드 시골 마을에서 유리 공예를 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좋은 파도를 기다렸다. 서로의 언어를 가르쳐주며 어눌한 발음으로 뜻도 기억나지 않는 말들을 주고받았었다. 그러다 파도가 너무 오지 않을 때면, 수면 아래로 헤엄쳐 들어가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더 따뜻한 물속으로.

 

헤엄치는 한 마리의 돌고래 같기도 하고,

날아오는 한 마리 새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 무엇이 되었든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깊고 고요한 바닷속에서 위로를 받고

눈부신 태양과 친구 하는

그런 영혼이었다.

 

파도를 기다리면서 나눴던 이야기들은 서핑을 처음 시작하는 그 순간과 가장 잘 어울렸다. 그는 바다보다 더 깊은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듯했다. 역설적이게도 파도는 그를 얕은 해변으로 밀어내지만,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를 넘어 다시 깊은 바다로 들어가야 했다. 유리와 그는 잘 어울렸다. 아주 뜨거운 온도에서 자신을 녹이고 또 굳히고 또 녹이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겠지만, 그 어떤 것 보다 빛나고 단단한 존재가 되기에.

그에게 기억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머무를 때, 우리의 대화와 웃음과 그 모든 순간이 파도가 잔잔해지면 생각날 것이다.


제주도에서의 긴 여정의 끝이 보였다. 마지막 날 아침, 나는 중문해변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을 걸으며 무언가 내 안에서 정리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따뜻한 햇살을 머금은 해변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제주도로 떠나온 이유가 생각났다. 그 당시에 나는 지독한 이별 끝에 겨우 나를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감정들과 시간들이 지나갔다. 혼자 그 추운 길들을 걸어내면서, 외로운 시간을 버텨내면서 잘 이겨냈다고 오만했다. 날씨를 탓으로, 하루를 핑계로, 나는 그리움들을 계속 꺼냈다. 내 작은 마음에 너무 많은 것들이 가득 차서, 나조차 담을 수 없음을 다 넘쳐 버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왜 추운 바다에 들어가려고 했을까. 아무도 찾지 않는 겨울바다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했을까. 아아, 그래. 나는 내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더 자유롭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올해 해는 다른 어떤 날의 해보다 크게 졌다. 건물에도, 나무에도 가려지지 않고 자유로운 일몰이었다. 그렇게 지치고 힘들었던 한 해의 마지막에 가장 큰 따뜻함으로 위로해 주었다.

올해의 마지막이 지나간다. 어쨌든 잘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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