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니 "채식주의자"의 독후감을 써둔 것이 있었다. 따끈따끈했던 2019년의 감상을, 아래에 그대로 옮겨본다. 가끔 일에 치여서, '한국에는 그저 매년 작아지는 부모님과 귀중한 시간을 보내러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걸로도 넘치도록 충분하지마는), '그래도 시집은 사 올 수 있지'라고 마음을 고쳐먹는 이유가 된다. 이 다음엔 또 언제 한국에 가게 될지 모르지만, 여전히 나는 영혼을 뒤흔드는 마주침을 기대한다.
*독자를 상정하고 씁니다. 판관의 마음으로 읽어주십시오.
그믐밤. 형광등 밝은 오피스에서, 어두침침한 마트 안으로 삼켜지듯 들어간 밤. 수고했노라며 반짝이던 마블링. 열심히 살고, 시체를 1파운드 사온 자정.
남 몰래 소고기를 구웠다. 반쯤 켜진 전등 아래서 살을 칼로 찢었다. 미지근한 단면은 붉고, 비린내가 체온처럼 퍼졌다. 너도 나도 열심히 살았구나. 결국 물컹이는 살점을, 씹지도 삼키지도 못했다. 며칠 후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비 오던 어느 아침, 눅눅한 침대 위. 모로 누운 자존심에 인스타는 화가의 그림을 보여줬다. 뭉클한 색채와 테두리. 지문자욱이 따라서 떨렸다. 뭉그러진 삶의 한가운데, 낮게 흐느끼던 냉장고 모터. 접속이 불량했던 죄의식과, 한숨만 내쉬던 전기밥솥.
또 다른 하루, 무심히 걸어들어간 서울의 12월 31일, 서점엔 한강의 시집이 있었다. 책을 반으로 쪼개면 시 두 편이 나왔다. 그 화가가 있었다. 도둑처럼 시집을 사들고 왔다.
"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 /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 그래서 /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오늘은 손가락을 물어 핏물이 번졌다. 이어폰 안에서 호로비츠가 쇼팽 Op.53을 친다. 이것도 살아있고 저것도 살아있다. 이것도 흔들리고 저것도 흔들린다. 이것도 저것도 온통 비린내가 난다. 밥을 먹는 것은 죄를 짓는 것, 사는 것은 죄를 짓는 것. 글을 쓰는 것과 죽어버리는 것은 더더욱 죄를 짓는 것.
부끄러운 독서를 했다. 그 흔적이 남았다. 상반신을 미끄덩대며 지나가는 커다란 공동. 사실 나는 마침표가 부족해서 살아있다. 말하지 않은 것들은 다 거짓말이다. 저항하는 모든 것에서 악취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