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찍찍이라는 게 있었다. 영어 교재엔 으레 테이프가 영어 듣기 용으로 딸려오곤 했었는데, 그걸 .5배속, 2배속에 간단한 조작으로 구간을 돌려 들을 수 있는 그런 기기였다. 잘 들리지 않은 부분을, 영어 공부할 때 나는 몇 번씩 돌려 듣곤 했다.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도 그렇게 읽힌다.
가령 존경하는 아버지가 단편의 시작부터 머리 위에서 떨어진 돼지에게 깔려 죽었을 때, 그리고 아버지를 존경하던 아들이 그 돼지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 읽었는가 싶어서 단 두 페이지를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이것은 그의 단편, "A Shocking Accident"의 서두이다.
첫 3페이지 동안, 그레이엄 그린은 서로 다른 3명의 화자가 서로 다른 의미로 "a shocking accident"라는 문장을 말하게 한다. 간결한 문체 안에서 그 화자들의 성격이 드러나지만, 그는 쿨하게 그 중 2명을 쓰고 버린다. 물론 한 명은 나중에 수거해서 다시 쓰지만.
4번째 페이지에서, 그레이엄 그린은 아버지와 아들의 대비를 통해 9살의 주인공 Jerome에게 딱딱한 성격을 부여하고 그에겐 아마도 버거울,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현실을 조명한다. 그러나 정말로 웃기는 것은, 주인공 Jerome이 같은 페이지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어떻게 스토리텔링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고민한다는 것이다. 그걸 읽고 있으면, 어느새 한 소극장 부조리극의 관객석에 독자는 앉아 있게 되고, 그 옆에는 연출가 그레이엄 그린이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다.
5페이지에선 부조리극의 2막이 오른다. Jerome은 스토리텔링을 건너뛰고, 대화 상대와 함께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의 죽음을 날씨 얘기라도 하듯 대수롭잖게 얘기한다. 아버지가 돼지에게 깔려 죽었다는 말에, 임의의 대화 상대는 인도에서 깔려 죽었냐고 묻고, Jerome은 이탈리아에서였다고 말한다. 상대는 흥미롭다고 말하며, 이탈리아에도 돼지를 사냥하는 풍습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서, 그레이엄 그린은 Jerome을 결혼시켜 버린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Jerome의 말에, 그의 부인은 안전운전하라고 말한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타자에 의해 Jerome의 부인은 시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다. 부인의 반응이 두려워 방을 슬그머니 나가려는 Jerome에게, Jerome의 부인은 진심으로 끔찍한 사고라고 말한다. 그 대답으로 인해 Jerome은 마침내 구원 받는다. 돌아오는 택시에서, Jerome의 부인은 Jerome에게 그 돼지는 어떻게 되었냐고 묻고, Jerome은 아마도 저녁으로 잡아먹혔겠지 라고 대답하며 단편은 끝난다.
이제 필자가 왜 몇 번씩 되돌아가서 읽어야만 했나 이해가 가시는지? 그의 소설은 늘 이런 식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들이 드러내는 이 세상의 불편하다면 불편하고 우습다면 우스운 일면들과, 그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기 위해 번민하는 사람들. 개인의 고통이 드러난 뒤에야 우리는 대수롭잖게 여기고 지나갔던 많은 것들이 부조리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의 단편들을 좋아한다.
이런 연유로 그레이엄 그린의 단편들은 내게 "세계소설"처럼 느껴진다. 단 6페이지면 충분하다. 작가가 보여주는 단면들로부터 독자가 자신이 보는 세계를 재구성하고, 어느새 연출가 그레이엄 그린과 나란히 앉아있게 되는 데엔. 그리고 그 6페이지를 다 읽고 나면, 그레이엄 그린은 옆자리서 이쪽을 보며 "너는 이제 Jerome에게 뭐라고 말할 건데?"라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