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간목 Dec 13. 2022

위화감에 대하여

임솔아, "초파리 돌보기"를 읽고

고려서적에서 금년도 이런저런 수상작 모음집들을 보다가, 2022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이름들이 몇몇 보이길래, 고민할 것 없이 그거 한 권 사 들고 돌아와 읽기 시작했다. 


한 바퀴 돌아, 마지막으로 "초파리 돌보기"를 읽었다. 스포할 게 아니라서, 그저 강렬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고만 하겠다. 아니나 다를까, 끝맺기가 너무나 힘들었다고 작가 노트에서 임솔아 작가는 밝혔다.


나는 임솔아 작가의 글, 그 특유의 질감에 매번 경탄하게 된다. 숙련된 화가가 아무렇게나 그린 선에서 어떤 생명이 느껴지는 것처럼, 줄글의 곳곳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사실 회화라기보다는 부조 같은 느낌이다. 


나는 임솔아 작가를 교보문고에서, 문지사의 495번째 시인선으로 처음 만났다. 선 채로 시집을 펼쳐든 순간, 첫 번째로 글의 생명력에 반했고 두 번째로 시를 이어가는 위화감에 반했다. 


"초파리 돌보기"에서 느낀 강렬한 위화감은 국소적이다. 스포 안 하겠다고 말을 극도로 아끼려니 죽을 맛이지만, 커다란 위화감이 소설의 허리를 꺾어버리면서 소설의 체급이 도리어 올라가는 것 같다고만 평하겠다. 


"초파리 돌보기"를 다 읽은 뒤에, 이 위화감의 근원이 알고 싶어져서 나는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꺼내어 읽었다. 임솔아 작가의 글에 반했던 두 번째 포인트(시를 이어가는 위화감들)을 다시 발견하곤, 나는 스토커 같은 짓을 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화감이란 보편적임을 반드시 말하고 싶었다. 가령 "첫 밥솥"에서 신에게 바쳐진 밥을 개가 먹어치우는 광경이 그렇다. 그 광경을 그려내는 문체도 담담하지 않은가? 소설 속에서 보자면, 분노감만 남았다는 치온의 얘기를 듣고는 지유가 얼굴이 터져라 웃는 광경과, 그것이 일상대화로 성립하는 구석이 그렇다.


이처럼, 커다란 위화감과는 별개로, 소설의 곳곳에는 위화감들이 도사리고 있으면서, 나의 섪은 예상을 노리고 있었다. 내 예상들은 (당연하게도) 살짝씩 빗나갔고, 때문에 이 소설을 다 읽는 데 나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동굴 벽에 비친 독자로서의 내 그림자를 분명히 볼 수 있었고, 그것이 흔들리는 모양을 보았다.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꺼내어 다시 읽었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아, "초파리 돌보기"는 정말로 소설이었구나.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위화감들이, 그것들 보편성이, 혹은 "결"이, 어쩌면 보다 커다란 위화감을, 허리가 꺾어진 소설을, 동굴 속에서 허리가 굽어진 채 불빛에 맞추어 흔들리는 독자 자신의 그림자들을, 일상의 원리들을, 더 크게 보이는 착시를 낳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건방진 생각을 했다. 


그렇지, 위화감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지. 


써놓고 보니 당연한 이야긴데, 나는 오늘 그것을 즐겁게 배웠다.


마치며: 소재와 문체의 싸이즈가 맞으면서 둘 다 흥미롭기란, 게으른 독자에겐 아무래도 드문 일인데... 몇 년 만에, 마음에 드는 소설을 하나 읽었다고, 그런 시건방으로 이 독후감을 마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속단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