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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간목 Dec 27. 2022

덜컹거리는 출력 장치

피아노 앞에 벽이 있다

그 벽을 두드린다

떠듬거리며 악보를 따라가다보니

그리고 글을 자꾸만 썼다 지우길 반복하다보니

어느덧 한 해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기실은 내 왼손도 오른손도

제각기 익숙한 곳만 눌러댔을 뿐이니...

88건반 소리가 다 같다가

달라지는 날이 언제 또 올까

타자기 건너편에는 내가 쓰고픈 글이 있을까


오늘 지하철에서는 사람들이 떠들어댔다

그것이 신물 나서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끼면

나와 당신들 사이에는 이제

진공의 벽이 있었다


다 같은 소리가 사라지고

다 같은 소리가 들려와서

내가 잘못했다고 알았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이 나무 되는 상상을 하고

금붕어와 해조가 해저터널 안을 날으는 상상을 했다


그 상상을 피아노 앞으로 다 가져와서

나는 벽을 두드린다

왼손에서, 오른손에서 내가 잘못했다는 소리가

아무렇게나 뛰어다녔다


곧이어 엄지손가락 두 개로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을 기어이 지하철에서 끄집어냈다

구태여 핑크색으로, 창 밖의 고래를 상상하며

오늘은 그렇게 한 해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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