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앞에 벽이 있다
그 벽을 두드린다
떠듬거리며 악보를 따라가다보니
그리고 글을 자꾸만 썼다 지우길 반복하다보니
어느덧 한 해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기실은 내 왼손도 오른손도
제각기 익숙한 곳만 눌러댔을 뿐이니...
88건반 소리가 다 같다가
달라지는 날이 언제 또 올까
타자기 건너편에는 내가 쓰고픈 글이 있을까
오늘 지하철에서는 사람들이 떠들어댔다
그것이 신물 나서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끼면
나와 당신들 사이에는 이제
진공의 벽이 있었다
다 같은 소리가 사라지고
다 같은 소리가 들려와서
내가 잘못했다고 알았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이 나무 되는 상상을 하고
금붕어와 해조가 해저터널 안을 날으는 상상을 했다
그 상상을 피아노 앞으로 다 가져와서
나는 벽을 두드린다
왼손에서, 오른손에서 내가 잘못했다는 소리가
아무렇게나 뛰어다녔다
곧이어 엄지손가락 두 개로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을 기어이 지하철에서 끄집어냈다
구태여 핑크색으로, 창 밖의 고래를 상상하며
오늘은 그렇게 한 해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