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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간목 Oct 27. 2021

아틀란티스

마법 같은 오후였다. 아직은 날이 추운 2월의 파크 애비뉴. 짜리몽땅한 솔론은 여느 뉴요커들보다도 오늘 빠른 걸음으로 퇴근했다. 동그란 코에 이마가 벗겨진 머리, 그러나 해묵은 갈색 정장에 체크 셔츠가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이 남자는 인상을 잔뜩 찌뿌린 채 53가 역 승강장에서 지연되는 E선을 기다렸다. 지연되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고, 벽에 기대서 기다리던 솔론은 자기가 탈 순서가 은연중에 조금씩 뒤로 밀리는 것이 신경쓰이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승강장 저 반대편에 감색 정장에 흰 셔츠를 말쑥하게 차려 입은 회사 동료가 허겁지겁 내려왔고, 곧 지하철이 들어왔다.


솔론은 덜컹거리는 불쾌하게 따뜻한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십 분을 넘게 부때꼈고, 23가 정거장에서 내려 한 무리 사람들과 섞여 그대로 지하철역을 나왔다. 마침내 빌딩과 사람들 사이로 찬바람이 불었지만,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솔론은 23 & 8가의 자기 집 앞 중국집으로 직진했다. 닭고기가 들어간 찹 수이를 저녁으로 사서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은 중국집 포스기가 고장났다고 한다. '앱으로 주문해놓을걸' 하고 솔론은 후회했지만, 별 수 없이 땀이 찬 뒷주머니에서 가죽 지갑을 힙겹게 비집어 꺼내 현금으로 음식값을 치루고 잔돈을 받았다.


속으로 오늘은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솔론의 집 앞, 도어 가드의 사각에 처음 보는 노숙자가 한 명 있었다. 하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노숙자는 솔론에게 선생님, 혹시 잔돈 있으시면 도와주실 수 없냐고 물어왔고, 솔론은 중국집에서 얻은 동전을 주머니에서 다 꺼내 노숙자에게 건넸다. 그러면 노숙자는 감사를 표하며 솔론에게, "신께서 당신과 함께하시길"이라고 빌어주었다. 솔론도 "선생님, 당신도요" 라고 말하곤 집으로 들어왔다. 그제서야 한숨을 돌린 솔론은 갈색 자켓을 벗어 나무 의자에 걸쳐놓고 찹 수이가 담긴 비닐봉투를 끌렀다. 닭고기가 아니라 랍스터가 들어간, 1불 더 비싼 찹 수이였다.


다음 날, 솔론은 조금 늦게 퇴근했다. 아침나절에 보니 빨래할 쿼터가 딱 하나 부족하길래, 솔론은 오늘은 낮중에 미리 델리를 들러서 잔돈을 바꿔온 참이었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짤랑거리며 어제 먹다 남은 찹 수이를 데워 먹으려 집으로 들어서려던 차에, 어제 그 노숙자가 보였다. 오늘도 노숙자는 솔론에게 선생님, 혹시 잔돈 있으시면 도와주실 수 없냐고 물어왔고, 솔론은 쿼터 하나를 뺀 나머지 잔돈을 다 꺼내 노숙자에게 건넸다. 그러면 노숙자는 감사를 표하며 솔론에게, "신께서 당신과 함께하시길"이라고 빌어주었다. 솔론도 "선생님, 당신도요" 라고 말하곤 집으로 들어왔다. 자켓만 벗어 의자에 걸쳐놓은 솔론은 그대로 빨래바구니만 들고 지하 빨래방으로 향했는데, 누군가 급했던 모양인지 45분 남은 드라이어에서 빨래를 꺼내가고 그대로 열어놓은 걸 발견했다. 마침 세탁기들도 모두 비어있는 걸 확인한 솔론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솔론이 집을 나서는데, 예의 그 노숙자가 집 앞에서 자고 있었다. 솔론은 손목시계를 한 번 들여다본 뒤 구둣발을 돌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엊저녁 빨래방에서 쓰지 않은 쿼터들을 모두 들고 와 노숙자의 머리 맡에 두고 돌아섰다. 잠결에선지, 그 노숙자는 솔론의 뒤에서 "신께서 당신과 함께하시길"이라고 빌어주었다. 솔론은 잠시 멈춰섰다가, 노숙자를 깨울세라 목소리를 한껏 낮춰 "선생님, 당신도요" 라고 말하곤 바쁜 걸음으로 출근길에 나섰다. 그 날, 2020년 2월 말엽의 어느 날, 솔론의 팀은 과열된 증시에 누구보다 빠르게 공매도를 치는 데 성공했다.


솔론은 첫날보다도 더 바쁜 걸음으로 오늘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에서 오늘은 하얀 수염이 덥수룩한 우리의 노숙자에게 아예 지폐 뭉텅이를 건내려고 하자, 그는 경계하며 솔론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곤 긴 손가락이 단정히 모인, 갈색의 두 손을 내저으며, 이런 큰 돈을 받을 순 없다고 말했다. 솔론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얼른 받으라고 재촉했지만, 노숙자는 계속해서 솔론의 표정을 이리저리 살피며 "선생님,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으셨나요?" 하고 물어올 뿐이었다. 솔론은 그제서야 자기가 대단히 수상하게 보일 거라는 걸 깨달았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시 생각하던 솔론은, "네 선생님, 오늘 제가 기분 좋은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랑 이 기쁨을 나누고 싶은데, 혹시 뭐 드시고 싶진 않으세요?" 라고 정중하게 물어봤다. 노숙자는 그제서야 하얀 수염 사이로 누런 이를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며칠 전 랍스터 찹 수이 냄새가 참 좋더군요."


집 앞에 나란히 앉아서 솔론과 샤이는 랍스터 찹 수이를 먹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더러운 노숙자와 갈색 정장을 차려입은 짜리몽땅한 뱅커의 식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솔론에게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솔론은 샤이에게 오늘 직장에서 감색 정장에 흰 셔츠를 말쑥하게 차려 입은, 머리 숱이 풍성하고 호리호리한 그 동료가 자기를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는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다. 샤이는 별 반응도 않고 그저 플라스틱 포크를 부지런히 놀려 찹 수이를 먹을 뿐이었지만, 솔론은 아무래도 좋았다. 잠시 후, 찹 수이를 다 먹은 샤이는 솔론에게 감사를 표하며, "신께서 당신과 함께하시길"이라고 했다. 솔론도 "선생님, 당신도요" 라고 화답했지만, 내심 샤이는 분명히 행운의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 이후로, 샤이와 솔론은 집 앞에서 저녁을 같이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행인들은 노숙자와 갈색 정장의 이마가 벗겨진 남자를 신기한 듯 쳐다보며 지나쳤지만, 익숙해진 동네 주민들은 이제 그 광경에 미소를 지어보이며 지나치기도 했다. 물론 샤이에게 솔론이 베푸는 친절이 꼬박꼬박 그 날의 행운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솔론은 이미 몇 개월 분은 가불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괘념치 않았다. 솔론에게 샤이는 이미 행운의 신이었다. 신자에게 과도한 행운이 미칠 악영향마저 배려하는, 친절하기 짝이 없는 신. 솔론은 퇴근길에 샤이에게 집 앞 델리의 커피를 바치고, 저녁거리를 바치고, 때로는 잔돈을 일부러 만들어서 바치며, 샤이에게서 매일 그와 함께하는 신을 나눠받았다. 짜증만 가득하던 솔론의 출퇴근길은 어느새 그 날의 행운을 기다리는 길로 바뀌었다. 파크 애비뉴에 위치한 솔론의 직장에선 최근 솔론의 자신감 넘치는 변화를 지난 2월 말엽 공매도의 커다란 성공 탓으로 여겼지만, 사실 솔론에겐 따로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저녁, 솔론과 샤이는 햄버거를 하나씩 해치운 참이었다. 배가 불러서 눈이 살짝 풀린 솔론은 아예 다리를 뻗고 길바닥에 앉았다. 그리곤 지나치는 행인들을 보며, 샤이에게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일만 하다 보니 이제 머리도 벗겨지고, 배도 나오게 됐고, 촌뜨기가 돼 놔서 회사 동료들 말고는 뉴욕에 아는 사람도 없고, 돈을 쓸 데도 없고, 쓸 줄도 모르고, 그러면 이제 이렇게 늙다가 혼자 죽는 게 아닌가 싶다고. 그처럼 별 생각 없이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샤이에게 하고 있다가, 솔론은 문득 자신이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기 자신이 엄청나게 끔찍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고, 솔론은 그 즉시 고개를 돌려 샤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샤이는 동정심이 넘치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솔론은 샤이에게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샤이의 커다란 두 눈에 자신이 비춰보였고, 솔론은 자기가 방금 화들짝 놀랐던 데엔 이 모든 행운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어 걱정한 것이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자신이 샤이에게서 행운 말고도 퇴근 이후의 시간, 그 무엇을 늘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끄러움이나 기쁨, 미안함, 치열했던 일터에서의 삶과 외로웠던 수많은 저녁들, 아무튼 지난 십수 년의 기억과 감정들이 한꺼번에 북받쳐 솔론은 아직 햄버거 기름이 남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고, 샤이는 그 옆에서 아무 말도 않고 지나치는 행인들을 지켜보았다. 그가 길바닥에서 안전하게 울 수 있도록.


그 주말, 솔론은 샤이에게 루즈벨트 아일랜드에 벚꽃이 피었다니 구경을 가자고 했다. 샤이는 자기 짐을 두고 갈 수 없다고 말했지만, 솔론이 자기 방에 잠시 두고 다녀오자고 했다. 그리고 솔론은 샤이에게 자기 집에서 샤워도 하고 빨래도 좀 하면 어떻겠냐고도 제안했다. 샤이는 잠시 생각하다 그 제안을 수락했다. 도어 가드를 설득하는 게 일이었지만, 도어 가드도 두 사람이 집 앞에서 가끔씩 저녁을 같이 보내는 건 알고 있었고, 이 집에서 오래 산 조용하고 모범적 주민인 솔론이 뭔가 좋은 일을 하려는 거라 생각해서, 노숙자를 재우는 것만 아니면 괜찮다고 말해줬다.


솔론은 샤이에게 몇 해 동안이나 쓰지 않았던 손님용 칫솔을 내어줬고, 샤이가 솔론의 화장실에서 땟국물을 씻어내는 동안, 솔론은 샤이의 빨래를 돌리려 내려갔다. 그런데 하필 주말을 맞아 빨래를 돌리려던 같은 아파트 주민이 빨래방에 먼저 와 있었다. 샤이의 빨래를 보고 그 더러움과 냄새에 경악을 하는 그녀에게, 솔론은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산책하기 참 좋은 날이예요. 그렇죠?"


샤이가 솔론보다 키가 한 뼘이나 더 컸기 때문에 솔론의 옷은 샤이에겐 좀 짧았고, 대신 품은 너무 컸지만, 샤이의 멋들어진 하얀 수염과 고단해보이는 그의 얼굴이 시너지를 일으켜 오히려 힙해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멋쟁이 흰수염 아저씨와 빛나리 뱅커 아저씨는 지하철을 타고 루즈벨트 아일랜드로 향했다. 주말이라 지하철이 늦게 왔지만, 오늘 솔론에게 그런 것은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영화 속 뉴요커들처럼 둘은 커피와 베이글을 양 손에 들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루즈벨트 아일랜드를 산책했다. 그리고 폐가 앞에 다다라서, 둘은 다리를 쉬려 잠시 앉았다.


휴일날 강가를 열심히 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솔론은 아시아권에 퍼지고 있는 바이러스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런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는데 끔찍하기 짝이 없다고, 잠복기도 길고, 증상도 없고. 아시아에서는 정부가 도시 전체를 틀어막고 있는데도 포위망을 뚫고 나온다고, 그러니 아시아발 비행기 편을 다 막아야 한다고, 어쩌면 미국에도 이미 들어왔을 수도 있지만, 할 수 있는 건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나마 자기는 부모님께서 은퇴하고 시골에 가 계셔서 다행이라고 강변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샤이는, "그럼 여기도 사람이 다 없어지겠군요" 라고 말했다. 솔론은 입을 다물고 샤이의 얼굴에 안광을 쏘아보냈다. 그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조용한 질문이었다. 샤이는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솔론에게 이렇다 할 답을 주진 않았다. 그러면 솔론도 눈을 내리깔고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말 없이 생각하는 동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급히 돌아오며, 솔론은 샤이에게 저녁으로 뭘 먹고 싶은지 물어봤지만, 샤이는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며 집 앞 자기 자리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솔론은 샤이에게 짐을 도로 들려서 내보내며 옷도 몇 벌 내주었고, 그 후 며칠 동안 그 집 앞엔 말쑥하고 힙하기 짝이 없는 노숙자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솔론은 빗소리가 멈춰서 잠을 깼고, 중대 결정을 했다. 그것은 샤이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하려는 것이었다. 샤이가 행운의 신이건 뭐건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였다. 루즈벨트 아일랜드로 벚꽃놀이를 다녀온 뒤, 솔론은 자기 친구가 자기 집 앞에서 노숙을 하는 것이 영 불편했고, 매일 아침이면 그에게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았을지 신경이 쓰이기까지 했다. 그 날, 일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린 날, 출근 준비를 일찌감치 마친 솔론은 안 그래도 깨끗한 집을 한 번 더 쓸고 닦았다. 갈색 양복 바지의 플릿까지 다림질을 마친 뒤, 마치 프로포즈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솔론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 앞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집 앞엔 아무도 없었다.


솔론은 그 날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자기가 샤이에게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간밤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머릿속으론 오로지 그 생각 뿐이었다. 직장 동료들은 오랜만에 예전으로 돌아온 솔론이 도리어 낯설었다. 오늘은 갈색 정장까지 묘하게 더 단정한 것 같고, 증시도 이제 반등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왜 미간에 주름을 꽉 잡고 속을 부글부글 끓이고 있는 걸까. 하지만 지난 공매도의 성공이 아직 선연했기 때문에, 어느새 동료들은 무언가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그를 흥미진진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솔론은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블룸버그 터미널을 들여다보며, 솔론은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샤이가 떠났다. 이제 미국에서 락다운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썰물 빠져나가듯 도시에서 나가게 되면, 샤이는 도대체 어디서 뭘 먹고 살라는 말인가? 그런데 도대체 왜 증시는 반등을 하고 있는가? 이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바이러스가 미국으로 건너오면 노숙자들이야말로 가장 위험에 처하게 될 텐데, 그리고 우리 동네 중국집이나 델리도 문을 닫게 될 텐데, 뭐가 좋다고 주식을 사고 자빠져 있는 거지? 솔론은 용서할 수 없었다. 가장 위험한 시기에 자기를 떠난 샤이도, 그걸 눈치채고 일찌감치 같이 살자고 말하지 못한 자신도, 그리고 이런 자기 마음은 모르는 채, 미국만은 모든 게 괜찮을 거라는 듯 오르는 증시도. 솔론은 머릿속이 웅웅거렸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솔론이 시뻘개진 얼굴로 공매도를 친 그 날은 증시가 파도처럼 부서졌던 3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몇 달이 지났고, 사람들은 각자 집에 갇히게 됐다. 솔론 역시도 건물 밖으로 나간 적 없이, 모든 걸 배달시켰다. 심지어 건물 안에서도 빨래든, 택배를 찾으러 갈 때든, 마스크를 써야 했다. 고향 부모님 댁에라도 갈까 생각했지만, 괜히 뉴욕에서 바이러스를 묻히고 가서 부모님을 위험에 빠뜨리는 건 아닐까 싶어 관두었다. 뉴욕 병원 응급실이 가득 찼다는 뉴스도 꽤 오래 됐고, 반대로 뉴욕 거리는 텅 비게 됐다. 사람들이 너무 죽어나는 바람에 시신을 안치할 곳이 부족해서, 브루클린에선 냉동차에 임시로 안치시켜뒀던 시신들이 썩는 냄새가 새어나오는 바람에 주민들이 신고를 했어야 했다는 끔찍한 소식도 들렸다.


하지만 솔론의 집에선 아무런 냄새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워크 스테이션이 들어선 솔론의 집은 조금씩 어질러져만 갔다. 손질을 멈춘지 좀 된 콧털이 하루 종일 거슬렸지만, 오늘도 솔론은 콧털 손질을 내일로 미뤘다. 전 세계의 돈이 미국 증시로 밀려들어왔지만, 직장에서 사람을 더 안 뽑았기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더래도 일은 오히려 늘었다. 퀭한 눈으로 솔론은 이제 알아서 잘 올라가는 증시를 보고 있다. 솔론의 팀은 계속해서 전설적인 실적을 올리고 있지만, 이제 솔론은 그게 다 자기랑은 상관 없는, 모니터 안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아무런 마법도 없는 날들이 몇 달이고 지속되면서, 솔론은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모든 마법을 잃은 초여름 어느 날이었다. 락다운은 단계적으로 풀렸지만, 점점 눈에 초점을 잃어가는 솔론을 걱정해 직장 동료들이 산책 갔다가 야외에서 저녁이라도 먹자며 보챘다. 솔론은 모든 게 귀찮았지만, 일단은 나갈 준비를 했다. 콧털 손질을 하고, 제멋대로 길어진 머리를 대충이라도 빗고, 코로나 이전보다 확연하게 늘어난 뱃살을 벨트 위에 얹고, 폴로 셔츠를 대충 걸쳐입고 마스크를 낀 솔론은, 락다운 이후 처음으로 건물을 나섰다. 구부정하게 집 앞을 나선 솔론은 건물 밖이 이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길거리는 여전히 텅 비어있었고, 쌀쌀했던 날씨에 어느새 덥고 습한 기운이 들기 시작했다. 빌딩 꼭대기에서 꼭대기로 새들이 푸드덕대는 소리가, 창문 너머로 듣던 것보다 훨씬 선명하게 들렸고, 바람결에 이마 위로 나뭇잎이 한 장 떨어졌다.


나뭇잎을 쳐낸 솔론은 지하철 역을 향해 걸어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예정된 동작이었다. 사실 솔론은 여지껏 일부러 그 곳을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솔론의 예정된 그 동작에는, 그야말로 한 번 침몰했던 세계를 되찾으려는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본 솔론의 눈빛은 더 이상 퀭할 수 없었다. 집 앞, 도어가드의 사각엔 노숙자가 한 명 있었다. 한 팔을 괴고 누워있던 그가 갈색 손가락을 단정히 모은 오른손을 솔론에게 인사하듯 들어보였다. 하얀 수염이 덮수룩한 그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지만, 그 이빨이 채 다 보이기도 전에 솔론은 달려들어 그를 끌어안았다. 냄새가 아주 고약했다. 빗고 나온 솔론의 머리는 헝클어졌고, 미처 다 정리가 안 된 콧털도 한 가닥 튀어나왔다. 그리고 솔론은 언어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연달아 낼 뿐이었다. 그러면 샤이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솔론을 안아주며 말했다:


"신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길, 나의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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