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바꿈

by 김간목

요즘 읽는 것보다 더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오늘 문득 들었다. 반성하는 중이다. 이게 5불, 10불 잔돈 거슬러주는 코딩 문제랑은 달라서, 글쓰기는 밑천이 오링 나도 에러 메시지가 안 뜬다. 그래서 눈치 못 채고 있으면 자가복제의 무시무시한 루프에 빠지고, 정신 차려보면 흑역사만 양산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튼 그래서 모처럼 시집들을 전부 꺼내놓고 좀 읽고 있는데, 문득 예전에 했던 무식한 생각이 기억났다: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줄바꿈이라고. 줄바꿈을 않음조차 시에선 의미를 갖는다고. 물론 수많은 문학가 선생님들께서 정립해놓으신 줄바꿈의 기준이 있지만 (예컨대 심상은 한 줄에 하나만 들어가야 한다든지, 그런 형식들은 다 내다버리라든지), 다람쥐는 그렇게 오래 공부 못해. 뭐야 그거 몰라 어려워. 다람쥐는 눈 앞에 내가 쓰는 똥글의 있어 보이는 줄바꿈이 더 소중해.


잠시 정신줄을 놓았다. 아무튼 그게 기억나는 바람에, 줄바꿈을 신경 쓰면서 읽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떤 널리 칭송 받는, 수준 높다는 시를 한 번 읽어보다가, '이거 굳이 줄 바꾸는 수고를 들여서 시로 내야만 했나? 그냥 붙여서 수필로 내지?'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할 뿐 아니라 사람이 오만 혹은 잔인해지기도 한다. 참고로 어떤 시인지는 편리하게도 까먹었다 (당당).


아무튼 내 안엔 뭔가 줄바꿈의 모호한 기준이 있는 것 같다. 그 기준이 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서 줄바꿈이나 쉼표, 구두점 등등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매번 주먹구구로 따져 쓰게 된다. 하지만 기준이란 게 있기는 있는 것 같다. 알아보기로 했다.


우선 이 기준이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를 고민해봤는데, 뭘 어디서 왔겠는가. 이것저것 흉내내고 짜집기하기 바쁜, 읽었던 시들에서 왔겠지. 따라서 시집들을 전부 꺼내놓고, 무작위로 고른 시들 중 일부분을 타자로 쳐서 줄바꿈을 없애버린 뒤, 이걸 내가 썼다면 (와, 정말 그랬음 좋겠다) 어디에서 줄을 바꿨을까 하고 나름대로 예제를 셋업해서 풀어봤다.


그럼 오늘 두어 개 정도 같이 해보자. 예컨대 기형도 시, "나리 나리 개나리"의 일부를 가져오면: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자,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어디서 줄을 바꾸면 좋을지 생각해보자. 필자의 경우 다른 데는 다 손쉽게 맞췄는데, 앞에서 생각없이 줄을 바꿨다가 "꺾어갔던" 이후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왜 기형도가 줄을 왜 그렇게 특이하게 바꿨어야 했는지 이해가 갔다 (가독성과 스포 방지를 위해, 정답은 아래에 별도로).


재밌지 않은가? 하나 더 해보자. 이번엔 조금 더 어렵다. 백석의 "함남도안"을 가져온다.


칠성고기라는 고기의 쩜벙쩜벙 뛰노는 소리가 쨋쨋하니 들려오는 호수까지는 들쭉이 한불 새까마니 익어가는 망연한 벌판을 지나가야 한다


이걸 내가 썼다고 생각하고 줄바꿈을 시도하려는데, 와... 이걸 내가 썼다면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다가 장례식엔 내 영정사진 대신 이거 놓아달라 할 생각이 방해를 한다. "칠성고기라는 고기"라니 크으...


그 따위 망상은 무시하고, 줄바꿈을 시도해보자. 만약 앞에서 생각없이 자르다 뒤에서 대책이 없어졌다면, 아마도 필자와 같은 우를 범하셨을 것이다. 역산하면 좀 낫다. 끝부분에, '아 이 문장을 자르는 건 준 범죄행위다' 싶은 부분을 일단 한 줄로 붙여놓는다. 이젠 앞에서 이지선다를 강요 당하는데, 줄 바꿀 자리 두 군데를 다 잘라놓고 읽어보면 뒤랑 균형이 안 맞아서 결국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 중에 딱 하나, 보다 자연스러운 선택지가 있는데 그게 정답이다 (정답은 아래에).


이렇게 까불고 놀면서,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줄바꿈이 뭔지 어렴풋이 짐작을 해본다. 하나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다. 이 둘이 호응해야 한다. 와, 써놓고 보니 너무 당연하다. '우리 팀엔 부족한 게 딱 2개 있어. 공격과 수비야' 딱 이거다.


근데 어렵다. 마음 비우고 한 줄에 내용 하나 담기도 어렵고, 그걸 왜곡이나 손실 없이 타자에게 전달하는 것도 일이다. 거기다 읽히는 리듬감도 좋아야 하며, 줄줄이 붙여놓고 봤을 땐 전체적인 그림이 떠올라야 한다. 이걸 사람이 할 수 있나?


내가 꺼내다 늘어놓은 시집들은 다들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줄바꿈 예제는 계속 오답을 낸다. 마종기, 황동규, 박준, 임솔아, 한강을 지나서 이제 신영배, 송승환, 정현종, 혹은 오규원 아저씨 시들을 예제로 풀어보는데, 슬슬 잘못했어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들 쓰시는 거지 도대체. 사람인가 다들.


한편, 서정주의 시는 줄바꿈 예제를 풀어보면 놀랍도록 쉽다. 여긴 확실히 사람이 아니다.


아무튼 그래서 나름의 답을 내고 의기양양해져선 본인이 이때껏 쓴 글에 위풍당당하게 들이쳤는데, 과거의 나는 아무런 의미 없이, 지 꼴리는 대로, 좀 있어 보일라고, 요령껏, 행간마다 아주 사보타주를 저질러 놨다. 수습을 해보려고 일단 노력은 해보는데, 잘못했어요 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폭주기관차처럼 멈추질 않는다. 일단 나를 좀 쥐어박고 앞으로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겠다 다짐하는 그런, 지극히 생산적인 토요일 밤을 보내고 있었는데...


반성한다고 고쳐질 재주였으면 진작에 고쳤겠지. 지금도 옛날에 썼던 거 수습 못 하는데, 앞으로 노력한다고 새 사람 새 글이 되겠냐고 어디. 공격과 수비 누가 중요한 줄 몰라서 못하나, 까먹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아무튼 이와 같이 반성은 짧고 관성은 길게, 나는 그냥 생긴 대로 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정답들: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기형도, "나리 나리 개나리" 중.


칠성고기라는 고기의 쩜벙쩜벙 뛰노는 소리가
쨋쨋하니 들려오는 호수까지는
들쭉이 한불 새까마니 익어가는 망연한 벌판을 지나가야 한다

백석, "함남도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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