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형에게

by 김간목

J 형,

오늘은 아쉽고 싫은 일들을 온통 해치우고 나서 술을 사러 왔소

아직 내가 모르는 술맛이나 봐 볼까 하다가

이름에 타이어가 들어가는 정말로 타이어 맛이 나는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형 좋아하던 맥주를 사 왔소


형,

어째서 그리 사셨는지 그 때는 알지 못했소

펜을 잡으면 무적, 전선을 잡으면 전설, 그러나 형 손에는 담배가 젤루 잘 어울렸지 형 얇고 가지런한 입술에서 담배 연기가 씨발 소리처럼 뿜어 나오던 아침 9시 수학과 건물 앞

10년 전 그 날엔 낙엽이 지고 있었소 나도 오늘 서른 넘겨 낙엽 속을 가는 길이오 방금 자전거 탄 사람 하나가 낙엽을 온통 일으키고 지나갔소


형,

자전거는 여전히 잘 타시오

녹이 슨 자전거로 형이 멀리도 가셨던 건 결국 형 다리 두 짝이 남달리 튼튼했기 때문 아니오?

그거 적당히 멀리 좀 가시지

말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한국을 가 버릴 줄이야 도대체 누가 알았겠소 타이어 맛 술이라도 없어서 못 마시던 때, 형이 속에 낙엽을 무더기로 쌓아뒀던 것을 누가 알았더라면 시원하게 잘못 함 저지르고 줘팸이나 당했을 거요 마침 그 집엔 빗자루도 꽤 튼튼한 게 있었으니 형 쌓인 속을 쓸어내는 데엔 우리 정도면 쓸 만하지 않았겠소?미안하게 생각하오


J 형,

그 때, 우리 위로는 아무도 없어 미국 땅 한가운데 아무런 연고도 없이 떨궈놓은 스무 살 우리가 병신 무더기들이던 그 때, 떼거리로 좆됨의 경계에서 허우적거리다 용케 죽지도 않고 졸업들을 했던 그 때, 나는 우리가 더 먼 길을 가는 줄로만 알았소

하지만 이제가 되어 나는 멀리 가지 못했소 내가 쓰고 싶은 시는 아무도 써주질 않아 못난 두 다리로 숱한 스톱 싸인을 10년 넘게 굼쩍거리며 지나쳐 오고 나서야 이름에 타이어가 들어가는 정말로 타이어 맛이 나는 맥주는 라벨에 자전거가 그려져 있는 것마저도 나는 오늘 첨 알았소

여전히 나는 형이 좋아하던 이게 쓰고 맛없고 싫지만 마시고 있노라면 어쩐지 형에게 아무 말이나 묻는 것 같으니 적적한 이참에 잘못이나 부러 함 해봅시다


형이 먼저 자전거에서 내렸던 길 없는 그 곳에 내가 왔소 여기가 막다른 길이 맞소? 온통 낙엽 뿐인 이 곳을 혹시 형도 걸으셨소? 걷고 계시오 다리 두 짝은 여전히 튼튼하시오 튼튼한 두 다리로 혹시 보이지 않는 저 낙엽 무더기 깊은 곳에 이미 가 계시오 아니면

혹시 내가 이제가 되어 형을 또 지나오고 말았소? 본 사이 형은 혹시 담배도 끊은 게 아니오?


형,

핸드폰은 이제 개통했다고 들었소

혹시 이 글을 보게 되면 지랄 말라고 면박을 무척이나 주고 싶겠지, 그럼 전화나 함 주시오

이만 줄이겠소

그리고 담배 안 끊었으면 슬슬 끊으시오 그러다 죽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편두통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