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찌짐에 대한 첫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편식 대장이었던 어린 시절, 밀가루만 골라 뜯어서 먹던 다른 찌짐들과는 다르게 호박 찌짐은 전체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이 음식이 경상도에서 어느 정도로 보편적이냐면, 이 호박채를 쉽게 긁어내기 위한 채칼이 따로 있다. 늙은 호박이 나오는 계절에는 요일별 열리는 장터는 물론 대형 마트, 심지어는 백화점 식품관의 코너에서 팔기도 한다. 적어도 40대 이상의 경상도 출신 사람들에게 "호박전"은 애호박전이 아닌 이 호박찌짐이다.
외할머니는 이 호박 찌짐을 반찬보다는 간식으로 만들어주셨다. 계란찜을 만들기도 하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국그릇에 호박과 밀가루를 섞어 부쳐주셨다. 이 호박 찌짐을 나는 참 좋아했다.
엄마가 되고서 아이의 반찬은, 간식은 무엇을 해주나 항상 고민이 되었다. 충청도의 작은 동네에 살고 있을 때 요일 장터에 할머니들이 늙은 호박을 잘라 파시는 걸 보니 어릴 적 먹던 그 달콤한 찌짐이 떠올랐다. 채 썬 호박은 없냐고 여쭤보니 그건 없다며 가져가서 썰어 사용하라고 하신다. 한 봉지 천 원을 주고 사 와서 가늘게 채 썰어 부쳐봤는데 우리 할머니의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설탕을 넣어봐도 들척지근하기만 할 뿐, 옛날 그 맛있는 달콤한 맛은 나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 같은 시장에 갔는데 할머니가 채 썬 늙은 호박을 몇 봉지나 가져오셨다! 여러 지역에서 온 군인 가족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그런지 나 말고도 채 썬 호박을 찾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나 보다. 심지어 채칼로 긁어낸 호박이 아니라 칼로 썰어 낸 호박이라 뭉개지지도 않았다! (충청도의 할머니는 늙은 호박을 긁어내기 위한 채칼이 있다는 걸 모르실 것만 같다.)
채 썬 호박 한 봉지만 달라고 하니 옆에서 장을 보던 경상도 말씨의 할머니가 눈이 동그래져 나를 쳐다본다. 요즘 젊은 사람이 호박 찌짐을 만들 줄 아냐고 한다.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인데 할머니 맛이 나지 않는다며 처음 보는 할머니께 하소연도 해 본다. 할머니가 웃으시며 물 넣지 말고 호박에 뉴슈가와 소금을 넣어 절여놓으면 물이 나오는데 그 물에 부침가루를 넣고 부쳐보라고 하신다. 집에 뉴슈가는 없어 황설탕과 맛소금으로 절여 바삭하게 부쳐 한 입 맛보았다. 아아! 우리 외할머니의 그 맛이 난다.
아이에게 엄마가 어릴 적 먹던 음식이라며 주니 오물오물 잘도 먹는다. 타지에서도 우리 외할머니의 음식을 먹을 수 있어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이도 나중에 이 시절을 추억할 때 엄마의 호박찌짐이 기억 한편에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