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친가는 종가였고, 제사가 많았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큰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는 4대까지 지내는 제사, 명절, 묘사 등등 제사가 정말 많았다. 특히 명절에는 근처에 사는 나에게는 먼, 아빠에게는 사촌 되시는 가족분들까지 오셔서 사람이 가득했고, 음식 준비도 많이 해야 했다.
당시로는 드문, 대학을 나와 직장 생활까지 하던 도시 여자 우리 엄마에게는 종가 막내며느리의 역할이 조금은 버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눈치 없고 사람 좋아하고 마냥 해맑은 그녀의 자식들은 명절과 제사만 손꼽아 기다렸다. 큰집에 가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이모와 삼촌처럼 재밌게 놀아주는 사촌들이 있었다. 다른 친척들도 오랜만에 집안에 생긴 어린아이들을 마냥 예뻐해 주셨다. 시골 큰집에는 흙 마당이 있었고, 화단이 있었다. 봄에는 앵두를 따서 먹기도 했고, 여름에는 마당 수돗가에서 물장난을 했다.
하지만 역시 먹보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여러 부침개들을 마련하던 모습이다. 인사 오는 사람도 많고, 명절 손님에게 전 한 접시와 식혜 한잔은 꼭 대접해야 했던 시절이라 종류도 양도 그득그득했다. 명태와 대구포를 뜬 전유어를 시작으로 채소전, 부추전, 녹두전, 동그랑땡, 육전, 그리고 마지막에 만드는 찹쌀 부꾸미까지 참 종류도 많았다. 오죽하면 우리 고종사촌 오빠는 본인의 엄마에게 "외갓집에 가면 엄마 일 많이 해야 하니 이제 가지 말자"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많은 전들 중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쭈욱 나의 베스트는 단연코 "육전"이다. 엄마와 숙모들이 부엌에서 전을 부칠 때면 육전 하나를 얻어먹기 위해 기웃기웃했다. 제사가 끝난 후 음복을 할 때도 약과나 떡 같은 것을 집어먹는 사촌들과 달리 나는 높이 쌓인 전의 탑에서 육전 한 장을 쏙 빼서 먹었다. 달콤하게 양념을 해서 구운 소고기 꼬치도 있었고, 삶은 돼지고기와 닭고기도 있었는데, 밀가루와 달걀 옷을 입혀 기름에 지진 노란 육전이 가장 맛있었다.
언젠가부터 내 생일이면 엄마가 육전을 해 주셨다. 오직 생일을 맞은 딸을 위한 엄마의 육전은 좋은 부위를 써서 도톰하고 보들보들했고 따뜻해서 참 맛있었다. 하지만 가끔씩은 얇고 식은 제사상 위의 육전이 먹고 싶은 날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경상도 시골 종가의 막내 손녀는 서울로 시집을 가 큰며느리가 되었다. 먹는 것만큼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나는 결혼 후 처음 맞은 명절이 조금은 기다려졌다. 차례상에 필요한 음식을 만든다는 사실이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 육전을 실컷 먹어야지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런데 서울의 제사상은 생각보다 간소했다. 친정의 명절 음식 준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들었던 전은 딱 3가지만 올랐는데, 동태전, 꼬치전, 동그랑땡 이렇게 3가지였다. 대신에 제사상에 나박김치와 간장과 구운 김이 올랐다. 그리고 설날엔 떡국 대신 만두를 빚어 떡만둣국을 준비했다. 삶은 닭고기도 돼지고기도 문어도 없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육전이 없다니... 너무 아쉬웠다. 큰집에서는 명절 차례상 준비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했는데 시댁에서는 오전에 시작해 점심 무렵이면 대부분의 준비가 끝이 났다. 후에 큰집에 가 사촌 새언니들에게 이야기하니 시집 잘 갔다며 부러워했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설 명절에 남편은 부대 일로 바빠 서울 본가에 가지 못한다고 했다. 시어머니도 배 부른 며느리가 남편 없이 혼자 먼 서울까지 오게는 하는 것이 미안했는지 친정에서 명절을 보내라고 하셨다. 참으로 오랜만에 시골 큰집의 명절 차례에 참석했다. 큰어머니는 배가 불러 찾아온 조카딸을 무척 반가워하시며 옛날 손님에게 내어주던 풍성하게 차린 부침개와 식혜들 주신다.
어쩐지 눈치가 보여 부엌으로 가 일을 도와 드리려 하니 새언니들이 아기씨는 가서 쉬라며 방으로 내몬다. 민망한 마음에 "서울 가면 나도 맏며느리인데" 하며 슬그머니 방으로 가 큰어머니가 차려주신 부침개 상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접시 위의 육전이 참 반갑다. 옆에 앉은 사촌오빠에게 오랜만에 쓰는 경상도 사투리로 "오빠야 서울에 시집갔더니 차례상에 육전이 없다"라고 해 본다. 오빠가 육전을 입에 손수 넣어주며 "아이고 우리 동생 여기서 많이 먹어라~ 그리고 육전이 먹고 싶으면 시댁 갈 때 고기를 사서 가라. 나는 이번에 쥐포튀김 먹고 싶어서 쥐포 사 오고 갈비찜 먹고 싶어서 소갈비 사 왔다." 한다. 내가 만들면 이 맛있는 맛이 안 나고 고기 맛 달걀 맛만 나서 맛이 없다며 하소연도 해 본다.
아이를 낳고 맞은 명절을 앞두고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차례상에 육전을 올리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러자고 하신다. 큰엄마와 통화를 하며 명절 육전의 비법을 여쭤보니 대견해하시며 말씀해 주셨다.
코로나로 인해 친정과 시댁을 가지 못하던 지난 설날, 어릴 때부터 그득그득한 명절 음식에 둘러싸여 휴일을 보내던 먹보 큰며느리는 떡국 한 그릇만 끓여 먹기엔 뭔가 아쉽고 쓸쓸하다. 일곱 살 아이에겐 티브이를 틀어주고 힘들게 음식 하지 말라는 남편은 낮잠을 재워놓고 혼자 명절 음식 준비를 하여 본다. 내가 한 육전을 먹어보니 옛날 큰집의 맛이 난다. 제사상에 올릴 것도 아니니 시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방법대로 후추도 솔솔 부려 밑간을 해 본다. 입속은 즐거웠지만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 생각에 잠시 마음이 아려온다.
육전
재료; 육전용으로 얇게 저민 쇠고기 우둔살 혹은 홍두깨살, 참기름, 고운 소금, 후추, 밀가루, 달걀, 식용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