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무들은 죽었습니다. 아파트와 함께 서있던 우리들은 사진에서처럼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사람들이 살던 콘크리트 건물뿐입니다. 우리 때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아파트 동호수가 선명하게 보이네요. 정말 상상도 못 할 풍경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존재했던 모든 것은 사라지고 이제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만 남았습니다. 단지 안에는 수천 그루의 나무들 중에서 아직 덜 베어진 나무 몇 그루를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습니다. 땅에 발붙이고 연결되어 살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 공간에서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아파트 단지 경계선에는 우리들 키만큼 높은 펜스가 세워졌습니다. 펜스가 쳐지면서 우리들은 밖과의 관계가 차단되었습니다. 마치 울타리에 갇힌 것 같습니다. 우리를 잊지 못해서 가끔씩 찾아오던 사람들도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고립되어 그렇게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표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니라서 어울리는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르게 했을까?
우리는 크레인으로, 포크레인으로, 그리고 전기톱으로 뿌리 뽑혀 잘렸습니다. 우리가 아프다고, 무섭다고, 제발 멈춰달라고 어떤 말을 해도 인부들에게는 닿지 않기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인부들이 우리를 베는 작업을 하면서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생명체를 베는 데 편하게 작업을 할 수 있을까요? 그분들에겐 아무런 원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곧바로 하늘나라로 가지 못하겠습니다. 정말 우리는 왜 죽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르게 했는지가 궁금합니다. 자연 생태계의 순환과정의 순리대로 죽었더라면 우리는 얼마나 영광이었을까요? 나의 몸을 분해해 다음 생명에 되돌려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들은 하늘을 떠돌며 우리는 왜 죽어야했는지 그 이유를 찾으러 다녔습니다. 먼저 40년을 사는 동안 우리와 함께 했던 주민분들을 떠올렸습니다. 짧게는 1-2년 길게는 10년 이상을 보았던 분들 누구도 우리들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하지 않으신 분은 한분도 없었습니다. 그 분들 중에는 아파트 재건축 소식들 듣고 멀리서 우리를 보러 오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최근까지 이곳에 우리와 함께 사셨던 분들에게도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우리를 보고 지나칠 때마다 항상 우리들을 손으로 어루만지거나 때론 말없이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를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 방법을 찾으며 고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놀라운 사실을 탐사뉴스를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재건축조합원들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사셨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놀랍게도 재건축지역의 집주인들이 “66%가 안 산다!”, “강남3구 70%가 갭투자. 2020년 3월-5월 국토부 통계”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102회] 투기와의 전쟁, 왜 실패했나 (2020.09.07.)> 안 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떻게 여기에 살지 않았는데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땅에 발붙이고 평생을 살아야하는 나무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투자 목적으로 집을 사기만 하고 실제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한 사람이 몇 채의 집을 이런 방식으로 산다는 것을 듣고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아무튼 이런 분들이 주인이었다면 재건축이 될 아파트의 조감도에 그려진 미래의 집에 관심을 둘 뿐 우리 나무들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가 빨리 사라지고 삭제되어야 조감도의 미래가 다가올 테니까요.
생명을 중요시하는 생명 나라 계산법
우리의 죽음의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많이 언급하는 어떤 공통적인 단어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살리려면 돈과 비용이 많이 들어가니 ‘비경제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비경제적이라는 것. 그것 때문에 우리가 죽었다니요? 그 단어는 우리들 세계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 경제 개념을 자신들이 태어날 때부터 몸에 지니고 나온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경제적인 것을 따지는 것은 사람들의 삶에서 절대 지켜야할 불문율이며 철칙이며 어떤 장소와 상황에서도 통하는 계산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경제적’으로 사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태도에서 찾았지만 너무나 허무하고 씁쓸합니다. 나무 세계에서는 논리적인 경제 개념 대신, 함께 살며, 호혜의 선물을 주고받고, 그리고 아무 조건도 따지지 않는 환대를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처럼 비용과 편익을 계산하는 ‘차가운 계산기’<차가운 계산기, 필립 로스코(지은이), 홍기빈(옮긴이), 열린책들, 2017>에 생명체를 넣고 돌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쓰는 ‘경제 계산기’는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회이든, 그리고 자연이든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는 기계인 것 같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정말 무섭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우리들이 쓰는 계산법은 생명을 가장 중요시하는 ‘생명 나라의 계산법’<나락 한알 속의 우주, 장일순(지은이), 녹색평론사, 2009>입니다.
나무는 SOS 신호를 보냅니다
우리들이 죽은 뒤 채 얼마되지 않아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돌고 있다는 소식을 하늘에서 들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의 삶이 코로나 19 전후로 바뀌었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고민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삶의 방식들이 나오고 있는데 특히 인간, 자연, 환경 등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을 한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코로나 19가 인간의 끝없는 개발과 성장에 대한 욕망 때문에 자연이 훼손되고 파괴되어 생긴 전염병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사실 자연은 전부터 사람들에게 계속 경고를 보냈습니다. 특히 몇 년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빈번한 홍수, 폭염, 태풍, 한파 등 기상이변을 보이는 기후변화, 기후위기는 정말 종의 멸종을 부르는 무서운 상황입니다. 여기에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놀라운 ‘경제 계산기’도 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생명, 환경, 자연 등 생태적인 삶에 대한 고민과 함께 주위에 있는 생명들에 대한 관심과 태도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처럼 30-40여 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던 나무를 하나의 시설물처럼 쉽게 베어버리거나, 그것에 대해 아무런 반대 의견없이 묵인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죽어간 나무들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면?
도시에서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살던 나무들에 대한 이런 태도가 어쩌면 사람들이 그동한 대자연의 계속된 경고를 못들었던 이유이자 원인이 아니었을까요? 자연은 인간에게 위협으로 경고를 보내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이 힘들다며 ‘나를 살려달라’라는 ‘SOS 신호’일 수 있습니다. 이 신호를 들어야 합니다. 당신은 들립니까?
우리 나무들은 죽었습니다. 아파트와 함께 서있던 우리들은 사진에서처럼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사람들이 살던 콘크리트 건물뿐입니다.
우리 때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아파트 동호수가 선명하게 보이네요. 정말 상상도 못 할 풍경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존재했던 모든 것은 사라지고 이제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만 남았습니다
단지 안에는 수천 그루의 나무들 중에서 아직 덜 베어진 나무 몇 그루를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습니다.
땅에 발붙이고 연결되어 살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 공간에서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아파트 단지 경계선에는 우리들 키만큼 높은 펜스가 세워졌습니다. 펜스가 쳐지면서 우리들은 밖과의 관계가 차단되었습니다.
마치 울타리에 갇힌 것 같습니다. 우리를 잊지 못해서 가끔씩 찾아오던 사람들도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고립되어 그렇게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표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니라서 어울리는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크레인으로, 포크레인으로, 그리고 전기톱으로 뿌리 뽑혀 잘렸습니다.
우리가 아프다고, 무섭다고, 제발 멈춰달라고 어떤 말을 해도 인부들에게는 닿지 않기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인부들이 우리를 베는 작업을 하면서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생명체를 베는 데 편하게 작업을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