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던 날

by 글열음



세상이 하얀빛으로 바뀌던 날. '흰'은 새로움의 시작, 원초적인 것, 무채색이라는 언어로 다가온다. 이런 날은 일 년을 통틀어도 그렇게 흔하지 않다. 사계절 중에도 겨울, 그중에서도 어쩌다 마주친 하루에 불과하다.


눈 내리는 창가에서 나는 한동안 꿈쩍하지 않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육각형 흰 물체를 멍하게 바라본다.


그러다 그 풍경은 내면 깊숙이 잠들어 있던 지난 조각들이 하나 둘 세상 밖으로 나온다. 과거의 한때가 현재가 된 듯 다시 엮이고, 나는 마치 꿈을 꾸듯 그 안을 떠 돈다. 흑과 백은 시간을 거슬러 이어진 연결고리는 눈 속 장면들을 하나씩 둘씩 끌어올린다.


어느 해 겨울로 기억된다. 밤새 내렸던 눈으로 하얗게 변한 창덕궁은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말 그대로 꿈속의 별천지였다. 위엄 있던 회색 기와는 자취를 감추고, 눈이 수북이 쌓인 지붕은 마치 커다란 두 날개를 펼친 채 지상에서 막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흰 새처럼 다가왔다. 그 순간 장자의 글이 스쳤다. 큰 뜻을 품고 멀리 날아오르기 위해 세상을 응시하는 새 붕(鵬)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고, 나는 그 앞에서 나도 모르게 왜소해져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그의 큰 뜻을 알 수 없기에.


마침 지붕 처마 끝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잡상(雜像)들 조차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듯 느껴졌다.


눈부신 눈이 발산하는 빛은 어느 색보다 포용적으로 다가왔고, 아름다웠다. 꿈꾸는 듯한 별천지 같았지만 분명 꿈속은 아니었다. 깨끗함과 순수함, 그리고 포근함에 이끌려 무심코 이곳저곳을 가까이 다가가려다 몇 번이나 멈칫거렸다. 눈 속으로 발을 옮기는 순간, 그 차가움에 놀랐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면성을 지닌 눈은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는 듯한 세계로 이끌다가도 막상 가까이 가면 냉혹한 배타성을 드러낸다. 그제야 우리는 그것의 본질을 알아차리게 된다.


눈길을 조심조심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선정전이 눈에 들어왔다.


궁궐의 여러 전각 가운데 청기와로 유독 시선을 끌던 선정전 또한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기와 틈새로 쌓인 흰 눈 사이에는 물기를 머금은 기와가 푸른 모습을 드러냈고 그 짙은 청색은 청아한 신비를 품고 있었다. 지붕은 눈 내리기 전의 모습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정원으로 시선을 돌리자 나무들은 흰 눈을 감싸 안은 채 힘겹게 서 있었다. 어떤 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가 축 늘어져 있었고, 그 순간 눈 뭉치 하나가 미끄러지듯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었다.


후원길 입구에 다다르자 문득 그해 가을에 다녀왔던 풍경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가을이 한창으로 접어들었던 시기 후원은 붉은 단풍잎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때 보았던 나무들은 이미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로 그 자리에 흰 눈을 받치고 있을 것 같았다. 그중에 또 다른 나무는 미처 떨어지지 못한 마른 단풍잎 사이로 흰 눈이 살포시 덮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후원길에서 마주했던 의두합과, 연경당 인근에 자리한 애련정이 떠올랐다.


꿈을 끝까지 펼치지 못한 채 사라져 간 효명세자.


눈 속에 잠긴 의두합에도 하얀 눈이 고요함을 머금은 채 사방이 눈으로 덮여 경계가 지워져 버린 날, 그곳에서는 안과 밖의 구분조차 의미를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련정만은 다르게 눈이 모든 것을 덮어버린 날에도, 그곳은 여전히 선을 긋고 있었을 듯하였다.


그 뚜렷한 선 안에서, 그를 향한 그리움을 조용히 품은 채 애련정은 짙은 고요와 애잔함 속에 그대로 얼어버린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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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내부 한편에 자리한 낙선재도 예외는 아니었다. 같은 궁궐 안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궁궐과는 다른 분위기로 다가오던 곳이었다. 눈 덮인 풍경 앞에서 나는 잠시 넋을 놓았다. 왕궁이 지닌 권위적인 기운과는 달리, 이곳은 마치 사대부집 안뜰을 닮은 정갈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기품이 스며 있는 곳, 나는 그 모습이 좋아서 자주 찾았다.


기와지붕 위에 수북이 쌓인 눈과 굳게 닫힌 방문, 마치 흰 종이처럼 보이던 문은 묘하게 하나의 덩어리가 된 듯, 사물의 윤곽을 흐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방문틀에 새겨진 나무의 무늬만이 어둠과 밝음 사이에서 뚜렷한 선과 색을 입은 채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낙선재는 흑과 백만으로 이루어진, 단정하게 정돈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 두 색은 위엄을 품고 있으면서도 과장되지 않은 고귀함을 조용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날 눈 내린 궁궐을 돌며, 사방에 수북이 쌓인 눈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에 잠겼다. 밤사이 이곳에서는 눈 소리가 요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 궁궐은 숨을 죽인 채 쏟아지는 눈을 소리 없이 포근히 감싸 안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주변에 쌓인 눈은 흰 물감으로 덧칠한 듯했고, 때로는 지우개로 사물의 형태를 지워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흔적 없이 비워진 자리들은 어딘가 밋밋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지만 분명, 감춰진 부피 아래에는 무언가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나는 끝내 발걸음을 늦추며 조심스럽게 그 위를 지나갔다.



종로3가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찻길은 이미 눈이 녹아 질펀하게 물기로 젖어 있었다.

눈은 늘 그렇듯 오래 머물지 않는다. 내가 보았던 흰 세상도, 날개를 펼친 듯하던 지붕의 눈도, 잠시 놀란 표정이던 잡상들 또한 소리없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던 그날을.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나는 지난날을 가만히 펼쳐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