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다이어리, 그리고 말없이 흘러내린 고3 아이의 마음
며칠 전, 손잡이가 끊어진 종이봉투 하나를 버리려다
문득 그 안에 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열어보았다.
그 안엔, 작년에 다 써가던 다이어리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조용히 적혀 있던, 잊고 지낸 나의 한 줄.
“오늘도 수고했어. 숨은 잘 쉬고 있니?”
나는 그 글을 읽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치 오래된 내 마음이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었다.
정리를 시작한 건 단순한 충동이었다.
요즘 따라 책상 위도, 머릿속도 어지러웠다.
정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되돌리고 싶어서, 손에 쓸고 닦는 걸 잡았다.
서랍 안에는 이름표, 영수증, 받은 편지,
작은 물건들이 흘러나왔다.
하나하나 손에 쥘 때마다,
지난날의 내가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이건 왜 가지고 있었을까?”
버릴까, 말까 망설이며 붙잡는 그 순간들 속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놓지 못하고,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를 배워갔다.
정리는 결국, 버리는 일이 아니라
꺼내고, 들여다보고, 다시 놓아두는 일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지금 내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아이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연기와 노래, 뮤지컬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 무엇을 해도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마치 자신의 안에 오래된 돌덩이가 들어 있는 것 같다고.
그 아이는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 과정을 고스란히 겪었다.
상처 입은 엄마,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며
어린 가장처럼 살아야 했던 아이였다.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아이의 눈엔 눈물이 없었다.
하지만 눈물보다 더 많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그 아이는 조용히 나지막이 물었다.
“선생님, 저는 왜 이게 안 풀릴까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말했다.
“네 안에 그동안 억눌린 이야기들이 많았을 거야.
그걸 풀어내는 게 말이든, 글이든, 노래든…
너에게 맞는 방식으로 꼭 나와야 해.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어느 종이봉투 안에 조용히 담아두고 살아간다.
언젠가 꺼내보고, 들여다보며,
비로소 다시 나를 만나는 그런 시간들.
오늘도 작은 먼지를 닦으며,
나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울고 싶지만 울 수 없었던
그 아이의 마음도
언젠가는 따뜻하게 흘러나오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