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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정 Jul 16. 2024

괜찮아 잘 살아가고 있어

생각 기록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느낌이었고, 꾹꾹 눌러왔던, 내면의 깊은 바다로 숨겨왔던 존재론적 무가치함을 들킨듯한 느낌이었다. 사회 부적응자, 외톨이. 이 두 가지 단어는 필사적으로 내가 부정하는 단어이며,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수긍하는 단어이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감, 두려움, 불안감의 정체는 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그로 인해 결핍을 느끼지만,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개선하려는 용기가 없음에서 부각된다. 나는 늘, 타인의 인정과, 타인의 관심과, 타인의 정을 바랐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몸짓은 타인과의 교제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21살 무렵, 한참 친구들끼리 어울리고 놀 시기에, 나는 친구들로부터 도망치기 바빴다. 함께 술을 먹자며 권유하러 온 친구에게 댈 수 있는 핑계는 너무도 많았다. “아, 알바가야 해서”, “아, 오늘은 본가에 가는 날이야”, “아, 내가 술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 순간적으로 지어내는 핑계들은 거짓과 사실이 적절히 섞여있었지만, 적절한 핑계를 통해 관계로부터 나를 ‘보호’한 후에 찾아오는 불안감은 점차 나 자신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왜 피하는 거야”, “뭐가 두려운데?”, “이 시기에 친구관계를 맺지 못하면 너는 평생 외톨이가 될 거야”. 혼자이고 싶지 않지만, 혼자이고 싶은 기분을 아는가? 나는 이토록이나 모순적인 양가감정 사이에서 교착 상태에 놓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혼자 있을 때만 누릴 수 있는 수많은 혜택을 놓고 싶지 않았고, 동시에 타인과 함께하면서 누릴 수 있는 장점들 또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 중, 전자를 택하는 것이 더욱 쉬웠고, 현재도 이 선택을 반복하고 있다.

 

이상한 마법에 걸린 때가 있었다. 내 앞에 사람을 놓고 얘기를 해야 하거나, 밥을 먹어야 하거나 등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발표를 해야 하거나, 상대를 설득해야 하거나, 상대의 기분을 건드려야 하는 끔찍한 일을 해야 할 때면, 극도의 초조함을 느꼈다.

나의 동공은 상대의 눈동자에 단 1초 머물렀다가, 상대 뒤통수 너머에 있는 낡은 베이지색의 선반 위에 놓인 가짜 화분에 3초 머물렀다가, 다시 상대의 눈동자에 1초 머물렀다가, 차가운 물을 머금고 있는 물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의 손에 10초 머물렀다. 그날은, 대학교 동기와 오랜만에 만나서 초밥을 먹으러 간 날이었다. 겨울이었다. 내가 그날을 기억하는 중요한 단서는 그것뿐이다. 이외에는 상대를 마주하고 있는 내가 초조함을 느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뿐이다.

“내 표정이 지금 이 상황에 적절하지 않으면 어쩌지?”, “방금 내 리액션이 너무 성의 없었나?”, “이 친구가 나를 만나고 나서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끼면 어떡하지?”, “나는 나이에 비해서 너무 재미없는 사람이라, 엄청 지루해하고 있을 거야”. 누군가가 내 머리를 망치로 끊임없이 가격하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호흡이 가빠 오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낀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맺히고, 본래 다리를 떠는 습관이 없음에도, 다리를 떨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초점을 상대 눈에 맞추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초점을 한곳에 고정해두지 못하고, 눈이  코를 바라보면, 내가 눈동자를 피해 코를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챌까 봐 괜히 다시 나의 손을 바라본다. 그러나 곧, 상대가 자신과 얘기하기 싫어서 눈을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할까 봐, 또는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이 들통날까 봐 다시 상대의 눈을 쳐다보기를 연신 반복했다. 친구와 밥 먹을 것을 기대하며 20분가량을 검색해서 방문한 곳이었지만, 나는 초밥의 맛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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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불안장애. 대인기피증. 내가 겪었던 증상을 설명하는 용어로 이 두 가지가 가장 근접한 것 같다. “나만 관계를 이렇게 어렵게 생각하나”, “나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걸까, 내가 비정상인 걸까”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자가 진단. 나는 내 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왜냐하면, 내 주변에서는 나 같이 관계에 불안함을 느끼며 숨어사는 친구들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적막한 방 안에서 천장을 응시하고 있던 나는, 패배감을 느꼈다. 무엇 하나 잘난 것 없던 나는, 그 흔한 친구 한 명도 제대로 사귀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이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상대 앞에서 불안감을 느끼며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은 내 성격에서 비롯된 정신적 질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선천적인 특징이 아닌, 극복할 수 있는 질병. 이 사실이 나를 크게 위로했다.

이후 사회불안장애와 관련된 책을 읽었고, 오은영 박사님이 작성하신 ‘화해’라는 책을 읽었다. 나의 질병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나는 왜 불안감을 느끼는지를 생각하고, 분석하는 과정은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24살의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살아가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성공적인 자기 기만을 통해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잘 살아가는 것인지,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것이 잘 살아가는 것인지, 외로움이나 두려움 따위를 느낄 틈 없이,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잘 살아가는 것인지 잘 모른다.

게임을 할 때도 그렇다. 사전에 공략집을 공부해서 1초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게임을 클리어했을 때, 게임을 잘 했다고 할 수 있는가. 결과는 좋을지언정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는, 강박적으로, 게임에 매진한다. 게임을 즐기지 않고, 의무감으로, 완벽하게,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플레이하는 걸 ‘잘’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반면에, 공략집은 고사하고, 남들이 마지막 퀘스트를 하고 있을 때, 이제 튜토리얼을 끝낸 플레이어가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며 게임하는 것을 보고 게임을 ‘잘’ 한다고 할 수 있을까. 게임에 정답이 없듯이, 인생에도 정답이 없다.

게임을 하는 목적이 ‘프로게이머’인 사람은, 공략집대로 완벽하게 플레이하는 걸 ‘잘’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힐링’하기 위해서 게임을 하는 유저라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껏 즐기면서 플레이하는 걸 ‘잘’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본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이것은 타인이 정해줄 수 없고 오로지 자신만이 안다. 자신이 정말로 행복하고 좋아하는 일에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할 때, 자신의 목적과 우선순위에 맞게 행동할 때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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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의 경우, 관계를 필요하지만 관계가 주는 즐거움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동창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과거 얘기를 할 때는, ‘시간 낭비’ 같이 느껴지고, 이성들과 데이트하며 외로움을 달래는 시간들이 ‘의미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마땅히 그 시간들이 소중할 텐데, 신기하게도 나는 인간이라는 종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개인적인 친분을 맺고 유지할 때 나와 관계를 맺는 개인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 데 둔한 편이다.

곁을 쉽게 내어주지 않지만, 동시에 너무도 쉽게 내어줄 때도 있다. 내가 관계를 경시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품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마도 가족들에게 향하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비슷하거나 아니면 그보다 덜할 것이다. 물론 새싹과도 같았던 어린 시기에는 내면의 불안성을 낮추는 데 도움을 주고 어른스러운 사람들에게 동경을 품은 사랑이라는 것을 할 때가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고 머리가 커지면서 더 이상 그러한 것들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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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본인이 중시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본인의 목적에 부합하게 인생을 이끌고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관계, 돈, 명예와 같이 만인이 인정하는 중요 가치 ‘이외에’ 본인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 말이다. 내 인생의 목적은 자유, 사랑, 정의 3대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글은 따로 포스팅해두었다.

이 글에서 다시 얘기해 보자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내외적인 힘을 갖는 것이 부차적인 나의 목적이며, 궁극적으로는 누군가의 삶을 이끌어 줄 수 있을 정도의 지혜와 영향력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공인’의 말 한마디는, 동네 친구의 말 백마디보다 큰 효력을 발휘하니까 말이다. 누군가의 삶을 이끌어주는 데 가느다란 나의 인생 발자취가 도움이 된다면 나는 내 인생으로 하여금 실험하고 도전하여 당신들도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꽤 괜찮은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자가 되고 싶다.

그러나 이 또한 멍청한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현재로서 인정욕구를 부정하는 나는, 아마도 내 목적을 무력화시키지 않을까 싶다. 내가 꿈꾸는 목적이 나의 내면에 가식과 인정욕구와 우월의식의 산물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순수한 선, 순수한 배려, 순수한 희생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여러분에게는 목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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