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생각 기록
같은 시간이 주어져도, 누군가는 그 시간을 충분히 가치 있고 효율적이게 활용하지만 누군가는 그러지 못한다.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시간을 알차게 활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본인의 능력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본인의 상태를 자각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점진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본인을 몰아붙여야 한다. 욕구를 가지고 태어나 공동체에 소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숙명인 것이다. 시간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부정하는 사람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내가 말하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은, 정말로 ‘죽을 날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생물학적 죽음 말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자신의 모든 선택을 내맡기고, 충분히 변화를 꾀할 수 있었던 최악의 결말을 방치하는 사람에게 어떤 미친 운이 따를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게으름과 부정의 말로는 패배, 자기 기만, 현실 부정, 죽음뿐이다.
최근에 지인이 인스타그램으로 ‘아우렐리우스’ 관련 피드를 공유해 주었다. 가볍게 넘겨보다가 인상 깊은 구절이 있어 들고 왔다.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내면서도 나쁜 마음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펜을 놓지 않았던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삶은 연극과 같다. 그렇기에 얼마나 길게 공연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멋진 공연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 그 연극을 끝내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끝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끝낼 때는 반드시 먼진 결말로 끝낼 수 있도록 하라.’
‘살았다는 것과 그저 생존했다는 것.. 여기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살았다는 것은 무언가를 했다는 의미고 생존했다는 건 숨을 쉬고 있었다는 의미다. 나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숨 쉬며 생존하고 있는가? 인생의 길고 짧음을 논하기 전에 오늘의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끝낼 때는 반드시 멋진 결말로 끝낼 수 있도록 하라.“
”오늘의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과거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미련한 운동과 무모한 알바뿐이었다. 배워야 할 필요성도 못 느꼈고, 아는 것도 없었으며, 타인이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더 나아가 나 자신이 나를 증오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래도 삶은 살아야 했기에, 내가 짊어져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고 있었다고 본다. - 최선은 지식의 양에 비례한다. 이때의 나는 지식과 지혜가 0에 수렴했기에 과거의 내가 최선이라고 했을지언정 지금 내가 판단하기에는 미련하게 시간을 버린 것과 다름없다. 그 당시 나의 최선은 알바 10시간 이상 근무였다-
인생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기준을 높여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모든 것에 적용되는 ‘기준치’를 높여가는 과정인 것이다. 내적인 성숙함의 기준, 외적인 모습의 기준, 학습 수준과 학습량의 기준, 위생 상태의 기준, 일을 할 때 체계의 기준, 인간관계의 기준, 대화 질의 기준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무형의 것들에는 마땅히 ‘기준’이라는 것을 끌어낼 수 있고, 본인이 생각하는 기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탁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반드시 본인보다 높은 기준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기에 주변을 관찰하여 높은 기준을 가진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기준이 높은 사람이 소위 말하는 ‘배울 점 있는 사람’이다.
나의 경우 아무리 인격적으로 뒤처져있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나보다 ‘단 한 가지’라도 기준이 높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관찰하고 모방하여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어린 나이지만 주변에서 존경받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현재의 나는 시간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1분 1초가 너무도 값진 것이기에,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면 바로 내일의 내가, 1년 후의 내가 더 멋진 사람이 될 것이라는 걸 경험으로써 알기 때문이다.
시간을 활용할 때는 적어도 본인의 시간을 어디에 투자하는 것이 기회비용이 높은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뒤이어 시간을 투자할 대상을 골랐다면, 그 대상에 지속적이면서도 끈질기게 시간을 투자하며 적은 시간 대비 많은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효율성을 좇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어느 정도 전문가의 수준에 오르면 뒤이어 본인의 시간을 투자할 다른 대상을 겸한다.
나의 경우 처음에는 운동이었고, 두 번째는 독서와 글쓰기였으며, 세 번째는 일이었다.
운동을 통해 체력과 근력을 향상시켰고 향상된 체력과 근력은 학습을 할 때에도,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내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남들보다 인내력과 지구력이 좋았기에 대부분의 면에서 쉽게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더 빨리 배웠고, 더 빨리 적응했으며, 더 빨리 성장했다. 지금은 비대해진 근육량을 줄이기 위해 따로 근력 운동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정자세로 팔굽혀펴기 30개 이상은 한다.
독서와 글쓰기는 2022년 8월부터 시작한 루틴이다. 어릴 적부터 인복이 없었던지, 주변에는 나를 이끌어 줄 사람이 도무지 존재하지 않았고, 망망대해 같은 인생을 개척해나가려면 독서는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일 1글쓰기, 일주일에 1권 이상의 독서를 지속하며 불안정했던 나의 내면은 크게 안정되었고 독서 효율과 글쓰기의 효율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과거에는 하나의 글을 쓰는데 2~3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30분에 하나의 글을 쓸 정도로 숙달되었다. 내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어떤 글을 읽어봐도 대충 쓴 글은 없다.
독서 또한 과거에는 3일에 한 권 읽으면 잘 읽은 것이었지만, 우연히 알게 된 이웃님이 3시간 만에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독서 속도’의 기준치를 높게 설정하였다. 속독을 통해 2시간 만에 자기 계발서 1권을, 6시간 이내로 웬만한 두꺼운 책 1회독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효율을 끌어올렸다. 추가로, 나는 절대로 책을 1회독하고 끝내지 않는다. 적어도 2회독, 정리하면서 3회독은 해야 다음 책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일은 질릴 만큼 하다 보니, 사실 어느 업장에 가도 3일이면 일을 거의 다 배운다. 내가 일을 할 때 장착하는 마인드는 ‘이 자리에 사장님이 없어도 어떻게든 굴러가게 한다’이기 때문에, 내 옆에 사람이 없을 것을 가장하여 디테일한 부분까지 관찰하고 외워두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그날 배운 것을 메모하여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련한 나의 일하는 태도는, 언제나 큰 보상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지금 이대로라면 3년 안에 1억, 6년이면 2억 4천만 원을 모을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지금 루틴을 유지한다는 가정 하이다. 그럼에도 지금 나이에 이 정도 가능성은 내 또래 친구들보다 크게 앞서있다고 생각한다.
추가적으로 ‘컨디션 조절’도 신경써야 한다. 이 또한 시간을 투자할 대상으로 적절하다. 본인이 얼마큼의 수면을 취하고 어떻게 기동해야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나의 경우 하루 12시간 일하고 4시간을 자면서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여 힘든 노동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정말로 피곤할 때는 낮잠을 1시간 정도 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일에 지장이 생길 거 같으면 하루 날을 정해 하루 종일 잠만 잔다.
또한 일을 할 때에든, 일상을 유지할 때에든 정신적인 피로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정신적인 피로를 최소화한다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육체적인 노동으로 피로해진 몸에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받으면 몸의 긴장도와 스트레스 밀도는 높아지고 더 빨리 지쳐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랄 같은 일이 있어도 좋게 생각하려고 하며, 그냥 넘어가서 내게 지속적인 피해가 될 거 같다면 일에 체계를 잡든, 사람 때문이라면 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든 제스처를 취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어떤 문제를 그 자리에서 종결함으로써 미래의 내가 받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무엇이 되었든 나의 루틴에 차질이 생길만한 상황은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나의 잠재력을 해방시키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주변에서 “너는 잠재력이 엄청나구나”라는 말을 들어왔다. 나는 그 말을 내가 가진 자질 중 몇 가지만을 보고 얘기한 것인 줄 알았다. ‘성실함’, ‘인내력’, ‘이타성‘. 사실 내가 내세울 것은 이 3가지 밖에 없었다.
남들보다 똑똑하지도,
집안이 안정적이지도,
든든한 빽이나, 재정적인 지원이 있지도,
성격이 활달해 인간관계를 넓게 구축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 잘난 것 없던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변 사람들의 평균이 곧 나다.”라는 문장을 깊이 맹신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만날 사람이 없어도 배울 점이 없거나, 시간을 축내는 것이 목적인 만남은 절대 나가지 않았다. 외로워도, 힘들어도 혼자만의 시간을 온전히 보낼 수 있기 위해 노력하였고, 주변에 가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고립되어 혼자만의 평균이라도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주변 사람들의 평균이 나인데, 주변에 별 볼일 없는 사람 밖에 없다면, 안 나가면 그만이다. 내가 먼저 괜찮은 사람이 된 이후에, 사회에서 알게 된 소수의 멋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지금의 나는 내 시간을 꽤 잘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또한 내가 설정한 ‘기준’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기준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옆에 찰싹 붙어 나 또한 더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나 자신을 몰아붙이려 노력할 것이다. 현재 내가 가진 지식과 지혜에 빗대어 생각했을 때 내 잠재력은 50% 정도는 해방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