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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n 11. 2022

지하철을 타다.

내일 따윈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

 오늘도 지친 몸을 이끌고 구석에 난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지하철을 기다린다. 시간 맞춰 재빨리 오면 더 일찍 집에 갈 수 있는데, 걸음이 느린 탓에 터덜터덜 오다 보니 또 앞 열차를 놓쳐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집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긴 여정이다. 열차가 도착하면 빈자리가 있는지 빠르게 탐색해야 한다. 정거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과의 치열한 눈치싸움이 시작된다. 열차 문이 열리면 쏜살같이 빈자리를 향해 각자의 엉덩이를 내던진다. 그리곤 누가 오더라도 눈칠 보며 자리를 비켜줄 일이 없도록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한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리 모두 지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뚱이를 좁고 불편한 의자에 뉘어야 직성이 풀린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퇴근길이지만 오늘은 이 지긋지긋한 여정에 몸을 싣고 싶지 않았다. 열차가 왔지만 타지 않았다. 앞다퉈 내리는 사람들과 올라타는 사람들이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으로 뭉쳐졌다 이내 흩어졌다. 떠나버린 열차와 홀로 남은 나 사이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사는 건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이 지친 여정에 몸을 싣고 오가는 걸까. 배려를 잊어버리고 웃음이 사라져 버린 이 낡은 지하철에 매일같이 몸을 실으면서 우리도 제법 녹이 많이 슬었다는 생각이다.


 또다시 사람이 하나 둘 모인다.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오는 사람들 제각각 향하는 곳은 다르지만 어딘가 지친 얼굴 모양은 비슷해 보인다. 그 지친 얼굴들과 소음이 싫어 그만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린다. 돌아가면 또다시 내일이 올까 봐, 또다시 같은 일상이 반복될까 봐 한참을 열차를 타지 못했다. 내일이 오지 않는 곳으로 멀리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내일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멀리 떠나버리고 싶다. 감은 눈을 떴을 땐 모든 것이 처음 보는 광경이기를, 지치고 피곤한 일상이 아닌 때 묻지 않은 순수함만 가득하길 바라본다. 눈을 떴다. 생각을 실행에 옮길 기운도 없이 그만 열차에 몸을 실어버렸다. 첫눈을 보고 숨이 멎을 듯이 새하얀 눈밭을 뛰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그리워 눈물이 흘렀다. 또 하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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