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Mar 14. 2022

비 오는 날 아침, 혼자.

비를 좋아하던 어린 소녀


 대학교를 졸업하고 1년 반 정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왕성하게 대학생활을 하다 갑자기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고향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서 혼자 생활하며 공부를 하였다. 당시 대학교 친구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잘 지내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전화번호를 바꾸고 모든 SNS를 끊고 홀연히 사라져 버리니 후에 내가 다시 연락을 할 때까지 무척 서운했다고 한다. 그때는 합격하고 친구들 앞에 멋지게 짠 하고 나타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내 계획은 실패한 셈이다. 친구들에겐 서운함을 안겨준 시간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의 예민하고 독립적이고 감성적인 나를 일깨워준 아주 고마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월요일은 일주일 만에 늦잠을 자는 날이다. 쳇바퀴처럼 같은 일상을 반복한 내게 주어진 단비 같은 날이다. 월요일 아침이면 내가 좋아하는 브루노 메이저의 잔잔한 음악을 틀고 맘껏 감성에 취한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에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하고, 또 한 모금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혼자 자취할 땐 쉬는 날 창밖을 바라보며 이 시간을 가졌는데, 아빠와 잠시 같이 머물고 있는 이 집은 창밖엔 또 다른 집 창문이 마주하고 있어서 안타깝게도 창밖을 보며 멍 때릴 수는 없게 됐다. 하루빨리 안정적인 수입을 벌어 나만의 작업실을 가지는 게 꿈이다. 집안에서도 창밖을 보면 오늘의 날씨를 알 수 있는,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자동차, 이따금 깜빡이는 횡단보도의 초록불을 볼 수 있는, 커피 한 모금과 함께 하염없이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작업실을 얼른 가지고 싶다.


 아침시간은 공시생 때부터 이어지던 나의 유일한 자유시간이다. 모두가 출근하고 난 조용한 늦은 아침, 고요한 거리를 바라보며 때때로 차가운 공기가 내 피부에 와닿을 때, 나는 현실에서 지내던 얇은 막을 벗어나 나만의 다른 세계로 빠져드는 느낌을 경험한다. 고요한 시간.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매일 보던 똑같은 거리도 새로이 다가와 말을 거는 듯하다. 오로지 느지막한 아침에만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고 취업을 한 후에도 쉬는 날이면 이 조용한 여유를 홀로 즐기는 게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온통 구름으로 가득 차 우중충한 아침이다. 오후엔 비 소식이 있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우중충하고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한다. 특히 이렇게 잔뜩 흐리고 비 오는 날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비를 좋아한 건 아주 어릴 적부터였다. 우산을 쓰고 나가 조용한 거리를 바라보며 축축한 흙냄새를 맡고 집으로 향할 때 비를 맞아 제법 지저분해진 운동화가 나쁘지 않았다. 학교에 입학하고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집단생활을 하면서 무리 속에서 잊힌 ‘진짜모습’이 오래간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세상을 감상하면서 다시 나온 것이다.


 어느새 커피가 다 식었다. 고양이는 이불속에서 곤히 자고 있고 집안은 시계 초침 소리만 가득 울려 퍼지고 있다. 늦은 점심을 챙겨 먹고 오늘은 우산을 쓰고 밖에 나가 걸을 생각이다. 머리가 부스스해지고 운동화는 지저분해지겠지만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고요하고 소중한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오늘이다. 비를 좋아하던 어린 소녀는 2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빗속을 걷는다.


 



이전 02화 불행은 끊임없이 비교하는 데서 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