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호] '첫(처음)'
눈은 소리 없이 내린다. 하얗게 움직이는 결정들이 세상을 일시정지시키는 듯하더니, 또다시 재생시킨다. 어지러웠던 풍경을 덮어 뽀얀 세상으로 만드는 자연의 마술. 시계 초침보다 느리게 내리는 눈은 잡생각을 누르고,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첫눈이 얼굴에 닿으면, 손바닥을 하늘로 펼쳐 그 찰나의 덩어리를 확인하게 된다. 소리도 색도 냄새도 없지만, 우리는 안다. 그것의 질량과 온도는 낯설고도 그리운 것이었다. 마치, 이미 알던 사람과 다시 처음 사랑에 빠질 때처럼.
내가 사는 곳에는 좀처럼 눈이 쏟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눈 내린 날은 손에 꼽혀서 거의 기억에 남아 있다. 한 번은 말이 트이기 전 아기였던 둘째와 동네 카페에 있다가 창밖으로 바람구경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투명하게 날리던 공기가 하얗게 보이더니, 이내 덩어리진 것들이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첫눈이 내리네-! 보여? 눈이야 눈!"
운 좋은 녀석은 이 지역에서 태어난 지 2년째에 눈을 보았다. 아직 아무 소식이 없는 남편은 하늘에서 뭐가 내리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일하고 있으리라. 그때, 별안간 학교 간 첫째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워치폰의 스피커는 주변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먼저 들려준다.
-엄마! 눈이 와요!
-맞아. 나도 보고 있어. 수업 중 아니야?
-밥 먹고 놀고 있어요. 엄마! 눈 맛 좀 보세요. 시원해요. 하늘에다 입 벌리고 있으면 돼요.
-에이 지저분하게! 아들- 엄마도 눈 보라고 전화해 줘서 고마워.
아쉽게도 센 바람에 실려 어지럽게 휘날린 눈은 10분 뒤에 그쳤다. 아이들이 급식소에서 강아지처럼 뛰쳐나와 눈을 맞고 또 입 벌리고 먹어보는 장면을 상상했다. 저녁에 귀가한 남편에게 오늘 눈이 왔었다고 하니 본인도 첫째의 전화를 받고 알았다고 한다. 그때 마침 직원들과 요즘 말 안 듣는 아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중이라 타이밍이 웃겼다고.
눈 내리는 순간 엄마 아빠에게 차례대로 전화한 초등학생 2학년.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동생이 태어났고, 그때부터 갑자기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던 첫째 아들이었다. 태어나 말을 트고 나에게 입을 옹알거리며 걸었던 첫말은 두 글자였다. 나는 아기에게 엄마라고 불리는 그때 비로소 엄마가 되었다. 원치 않던 동생이 생긴 탓에 보드라웠던 성격을 꽁꽁 감추기 시작하더니 언젠가부터 나를 한 글자 더 붙여 세 글자로 불렀다. 우리의 사이가 달라진 것을 무의식 중에 표현한 것일까. 어머니라고 부르기에는 한참이나 어린아이였는데.
눈이 온다고 전하던 문장에서 놀랐던 것은 다시 '엄마'라고 불러준 것. 비었던 한쪽 가슴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간의 첫째의 분노와 불안을 나무라기만 했던 부모의 죄가 눈에 날리고 씻기길 바랐다. 작은 입으로 아득하게 부르던 어머니라는 호칭 대신 개구쟁이 특유의 미성으로 '엄마!'라고 부르던 그때. 우리는 어쩐지 다시 익숙한 무게의 슬픔과 기쁨으로 꼬옥 뭉쳐져 단단해진 것 같았다.
눈은 사랑이 올 때와 비슷하다. 별안간, 갑자기, 다시 온다. 사랑한다는 말 글자 하나 없이, 형체 없이 다가와 따뜻한 마음에 녹는 것. 그리고 스며드는 것. '엄마 눈이 와요.'라는 말은, 나에게 '엄마, 나는 엄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번역되어 기억 중이다.
손과 뺨에 내려 스며든 첫눈은 사랑의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