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창낭창하다?

낭창낭창한!

by 오아린


아린 씨, 라켓 좀 줘봐요.


대회장에서 3전 3패의 예선 경기를 마치고 이제 마음 편히 응원석에 기대앉아 쉬려던 참이었다. 경기 그렇게 해놓고 쉴 때냐, 싶은 공기의 마찰이 귓전을 때린다. 클럽 회장님이 패배자의 뒷모습을 지나칠 수 없었는지 당사자 대신 장비 탓을 해준다.


-본인한테 라켓이 안 맞는 것 같은데?

-와, 그게 멀리서도 보이셔요?

-그럼 그럼. 공이 왜 저것밖에 안 나가지 싶었어.

-사실은 팔꿈치가 아파서 백핸드에 자신이 없어요.

-이것 봐. 나도 이렇게 뻣뻣한 라켓으로 흔들면 엘보가 아프다고. 자신한테 맞는 라켓을 찾아야 해.


실은, 하이클리어가 못내 아쉬워 두 달 전에 바꿨던 라켓이었다. 용품점 사장님께 당시 가지고 있던 라켓보다 클리어에 유리한 채를 추천받아 제대로 테스트해 보지도 않고 충동구매를 했다. 가볍고 내구성이 좋은 탄성소재 중 여성들이 많이 쓴다는 4U에서 한층 더 가볍게 나온 5U라켓으로 바꾼 것이다. 미세한 차이지만 어쩐지 공이 더 높게 쏘아 올려진다는 기분은 들었다.


라켓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나처럼 말로만 설명을 듣고 구입을 한다. 가벼운 게 최고도 아니다. 4U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것보다 무게가 있는 3U를 쓰는 여자 동호인도 있었다. 그 사람의 클리어는 일명 대포, 남자 아니냐로 수식이 되었다. 즉, 실력이 좋은 선수들은 장비에 상관없이 라켓이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깨끗한 기술을 펼칠 수 있다. 장비 탓은 실력이 오락가락하는 자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자, 그럼 라켓에 무게 말고 다른 어떤 중요한 요소들이 있는 걸까. 내 문제점은 셔틀콕이 시원스럽게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원인은 엘보통증에 있었다. 마침, 새 라켓을 쥔 이후로 백핸드 스킬을 배우면서 통증이 생겼으므로, 내 백핸드 자세에 문제가 있다고도 여겼다. 라켓과 연관 지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회장님의 조언을 듣고 나서 다른 동호인들에게도 내 라켓이 어떤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피드백은, "어우야, 이거 그냥 막대기 같아. 없던 엘보도 생기겠어."였다. 순간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정확히 두 달 전부터 테니스 엘보 증상을 겪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막대기 라켓 탓일거야


병원맛집을 찾을 것이 아니라, 라켓 명의를 찾아야 했다. 이후, 며칠간은 팔꿈치에 보호대를 한 사람들부터 눈에 띄었다. 그리고 라켓 동냥을 시작했다. "제 라켓 대가 너무 딱딱해서 팔꿈치 통증이 생기는 것 같아요. 라켓 한번 쳐봐도 괜찮아요?"라고 하면 '웃기지 말라, 그것은 너의 실력 탓이다.'라는 반응이 돌아왔지만, 빌려 써본 모든 이의 라켓은 내 것보다 부드러웠다.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채 또한 비교적 덜 뻣뻣하게 느껴졌다.


기세를 몰아, 여러 클럽 소속의 초심자들만 모여 있는 오픈채팅방 문을 두드려보았다. 고민과 증상을 설명하고 오프라인 때 한번 빌려서 쳐볼 수 있는지 물어봤다. 역시 초심의 마음은 초심이 아는 법. 모두 진지하게 본인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라켓 브랜드와 성질을 간략히 알려주었다. 몇 명은 내 것을 써보라고 먼저 제안도 했다. 추천받은 것은 모두 4U이상 가벼운 라켓들이었고, 헤드 모양이 각진 둥근형(셔틀콕이 잘 맞는 스팟이 일반 둥근형보다 넓음)으로 여기까지는 내가 아는 부분이었다.


대회에서 공개적으로 깨진 것, 팔꿈치 통증 덕분에 라켓에 다양한 속성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 특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라켓의 유연함, 속칭 '낭창함'이었다. 팔꿈치 관절에서 아래로 손목까지 이어지는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라켓 대가 뻣뻣한 것은 오히려 공격력을 높일 수 있는 속성이리라. 하지만, 나의 경우 아직 팔에 힘이 덜 들어가고 백핸드 스킬이 제대로 익지 않은 불안한 초심자다. 공이 잘 튕겨 나가지 않을 때 팔에 더 무리가 되는 것은 이제 여러 채를 들어봄으로써 실감하게 되었다. 공이 겨질 때의 타격감이 라켓에서 흡수되지 않으면 그만큼의 충격이 내 팔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럼, 라켓 대에 stiff라고 적혀있는 것은 피해야 했다. 대신, flexible 한 것을 골라야 했다. 거기에 낭창성을 더 추가할 수 있는 것은 거트(라켓 헤드에 거는 줄)의 탄성이다. 초심 여성들에게 아주 많이 팔렸다는 낭창낭창한 라켓을 나에게 소개한 친절한 남성 초심자는 거트 종류(요넥스 66)와 탄성(26)까지 꼼꼼히 알려주었다. 보통 탄성은 여성의 경우 24를 추천하는데 이 낭창라켓의 경우 거트 탄성까지 물렁하게 맞추면 네트 위에서 셔틀콕을 살짝만 띄워 넘겨야 하는 헤어핀에서 공이 붕 뜰 수 있다고도 한다. 나는 레지던트 의사에게 설명을 듣는 간호사의 눈빛으로 경청하였다. 역시, 맞춤 설명이 초심자끼리의 눈높이에서 이루어지니 바로 이해가 되었다.


안 그래도 가벼운 라켓인데 낭창거리기까지 하면 물러서 쓰나 싶은 고수도 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내 마음에 든 이 라켓은 마침 헤드헤비(무게감이 헤드에 있음) 형이라 컨트롤만 잘하면 낭창한 가운데 맵짤한 공격도 가능했다. 미적지근하고 씁쓸한 패배를 본 초심자는 단짠단짠의 배드민턴이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두 달간의 병원 신세와, 대회의 패배 경험을 안고 다시 용품점을 찾았다. 인정 많으신 사장님은 나의 헛소리 반 진심 반 사연을 듣고서 심히 안쓰러워해 주었다. 라켓을 잘못 팔았다는 말까지 하며 기존에 샀던 라켓은 책임지고 좋은 값에 중고 거래를 해 주겠다 한다. 그리고, 내가 외부 초심밭에서 꼼꼼히 추천받은, 달달하고 짭조름한 라켓의 브랜드명을 알리고 구해달라 부탁했다. 아, 그 낭창낭창한 거? 그래 잘 골랐네. 하신다. 역시.


나만 생소하지만 익숙하게 보이듯 유창하게 말한다.

"그리고, (암호명)거트는 요넥스 66에 탄성 26으로요."


사장님은 의사처럼 카리스마 있게 응대한다.

"아니, 자기는 25로 해."



가벼운 라켓 안에 무거운 세상이 들어있었다.

명의는 초심자들 속에도, 용품점 안에도 있었다.

고개가 낭창하게 끄덕여지며 납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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