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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 후선 Aug 19. 2024

기회란 놈. 참으로 고약한 놈이다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밤이었다. 언니와 나는 밤 예배를 마치고 친구들과 놀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교회와 몇 킬로 떨어진 집까지는 시골이라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밤길이었다. 친구들과 떠들며 깜깜한 길을 한참 걸어 산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쯤 왔을 때  저만치서 술 취한 아저씨 한 사람이 느껴졌다. 우리는 이 야심하고 깊은 밤에 무슨 일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점점 가까워지자 낯익은 사람이었다. 바로 우리 아부지였다. 아부지는 너무 취해 우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아부지요. 어디 가시는교?”

“엄마한테 가니더. 오리꼴 가려면 어디로 가는교?”

아부지는 그 야심한 동지 밤에 술에 만취해 할매 산소가 있는 오리꼴 골짜기로 가시는 중이었다. 할매 산소는 낮에도 가기 힘든 산속인데 말이다. 아부지는 우리의 만류에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우리는 큰오빠와 먼 일가친척인 아저씨에게 알렸다. 캄캄한 밤에 이렇게 나랑 언니, 큰오빠, 아저씨 네 사람이 아부지를 찾으러 산속으로 향했다. 그리고 30여 분 지나 비탈길에 미끄러져 쓰러져 계신 아부지를 만났다.   

  

이걸 뭐라 해야 할까? 운명이라 해야 하나? 인연이라 해야 하나? 천복이라 해야 하나? 

가로등 하나 없는 겨울의 시골 밤길은 인적이 거의 없다. 그런 시골 길 삼거리에서는 설령 사람이 지나간다 해도 3초의 시간만 어긋나면 산길로 접어들어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 타이밍에 우리가 아부지를 만났다. 

조상이 도왔단 말이 이런 걸 얘기하나 보다. 그 많은 날, 그 많은 시간 중에 삼거리에 우리가 지나가도록 도우셨구나. 할매가 당신 아들 살리시려고.  


목숨과 관련하지 않아도 운명적 타이밍은 많다. 사랑도 인연도 모두 단 몇 초에 갈린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회도 타이밍인 것 같다. 하지만 이놈은 좀 까탈스럽다. 사랑이나 인연과는 달리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싫어한다. 그러니 왔어도 잡을 수가 없다. 잡히지가 않는다. 참으로 고약한 놈이다. 


결혼 전 엄마는 우리 둘의 사주를 보고는 맞벌이할 것이라 했다. 그때만 해도 맞벌이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여자들은 극소수의 좋은 직업을 제외하곤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살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래서 우린 엄마 얘기를 믿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현장에서 일해 돈을 모아 사진학과를 들어갔다. 처음 사진학과를 들어갔을 땐 졸업만 하면 전문직 여성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졸업을 했어도 마땅한 직장을 구하기는 힘들었다. 그렇게 알바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히 길에서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친한 형님이 웨딩 이벤트 회사를 시작하는데 촬영기사를 구한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우연한 만남으로 전공을 살린 직장을 구하게 됐다. 그리고 또 선배가 결혼하면서 그만둬야 하는 스튜디오를 마침 계약만료일을 맞은 내가 이어하게 됐다. 이렇게 나는 전문직을 가기게 됐고 결혼 후에도 줄곧 맞벌이를 하게 됐다.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기회가 내 앞을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잡은 기회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기에 잡을 수 있었다. 내가 모를 뿐 아마 준비되지 않았기에 나를 떠난 기회도 많지 않을까? 


나는 지금 지천명의 중순에 있다. 이러한 하늘의 명을 깨달았기에 열심히 강연을 하고자 준비 중이다. 남들은 뭐 그리 대단한 삶을 살겠다고 그 나이에 계속 공부하냐고 한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아마 기회란 놈을 잘 모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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