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식사 후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동기들과 미리 약속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연구소 로비 뒤에 위치한 카페 앞으로 자연스럽게 모인다. 딱히 어떤 목적을 갖고 모이는 것이 아니라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그렇지 않고서야 카페 앞에서 모일 이유가 없다.)정확히 말해서──, 모인다는 말도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 만약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전부 나오지 않더라도 그 한 명은(가끔 나였던 적도 있다.) 그냥 자연스럽게 주문을 위한 줄에 서서 커피를 들고 어디론가 앉을 장소가 있는 곳으로 휭 하고 가버린다. 다른 누구를 기다리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러니까 ‘마침 카페 앞에서 만났으니 커피나 한 잔 하는 게 어때?’ 라는 느낌에 가깝다.
언제부터 이렇게 병적일 정도로 커피를 찾기 시작한 것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대학교 3학년 언저리였던 것 같다. 오후의 나른함으로부터 한 걸음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 카페인의 힘을 빌려야 했다. 뭐──, 언제나 저녁 마감까지의 못 다한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가 하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는 경우에는 과목별 시험공부까지 추가된다. 해본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만 그건 숨이 탁 하고 막힐 정도의 양이다. 그리고 조금 진행하다보면 커피나 담배 같은, 나름대로의 각성 수단 없이는 소화하기 힘들 것 같다고 바로 직감할 수 있게 된다. 변명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정말입니다. 아시잖아요.
“공대라서 그런 거 아냐?” 라는 말을 종종 듣기도 했지만 결단코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분야에나 각자의 고된 부분이 있는 것일 뿐이어서, 아마도 학기 시작부터 꾸준히 조금씩 실력을 쌓아 올린 착실한 학생의 경우에는 과제 마감일이나 시험기간이라고해서 특별히 힘들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나는 학창시절에 그다지 성실하거나 꼼꼼한 학생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랑은 아니지만 기억하기로는 학기 시작부터 그날그날의 과제를 끝내놓고 시험 대비를 한다거나 했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실감하고 준비를 시작하면 나름대로 열심히 하긴 했어도, 아마 그건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테니까 새삼 말하고 나니 부끄러워진다.
아무튼 학창 시절의 커피는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는(혹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나름대로 효율적으로 압축해서 사용하기 위해 찾아낸 수단이었던 것이다. 뭐──, 조금 더 극단적인 경우에는 에너지 드링크를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수면을 건너뛰고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해 오전 시험까지 끝마치고 기절해버리는, 그런 경우도 있지 않을까?
그에 비해 지금은 그때처럼 학기마다 보던 시험도, 매주 제출해야 했던 과제도 없지만, 오히려 그때보다 커피를 더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시고 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오후의 각성제로써의 역할은 제대로 하고 있으면서, 그게 전부는 아니게 되어버렸다. 뭐랄까, 자정이 되면 커다란 벽걸이 시계에서 손가락만한 뻐꾸기가 튀어나와 정확히 열두 번을 뻐꾹뻐꾹하고 우는 것과 비슷하다. 요컨대 시간을 실감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점심을 먹고 씁쓸한 아메리카노로 입 안을 씻어내고 나면, 그제야 ‘아아──, 이렇게 오전이 지나버렸구나’ 라고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가끔 주변에서 건강을 생각해서 차라리 녹차를 마시는 것이 어떠냐고 걱정해주기도 해서 시도해봤지만, 녹차 정도의 옅고 어중간한 쓴맛으로는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내 정신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인지라.
어쨌든 지금의 내게 있어서 커피라는 것은 각성제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으음──, 이런 식으로 합리화할 생각은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