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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은 해바라기 씨

by 겨울색하늘

지난 번 광저우 출장 중 하루는 늦은 저녁에 퇴근한 적이 있습니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졌고, 길거리에 보이는 가게들 절반이 문을 닫은 채로, 채워지지 않은 하루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호텔 주변을 한참이나 배회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간판에, 부끄럽지만 읽을 수 있는 글자보다 그렇지 않은 글자가 많아서 "여태까지 불을 켜고 있는 곳은 대체 뭐하는 곳일까" 라는 호기심으로 조명이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창문 안 쪽을 빤히 들여다보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신기한 물건이 많잖아요, 그 동네는?

그렇게 밤거리 구경을 실컷 하고는 정말로 지쳐서 근처 편의점에서 칭따오나 한 캔 사서 마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왠 걸, 신기한 것이 있었습니다.(뭐──, 그다지 신기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건 어릴 적 극장에서 팝콘을 담아주던 노란 종이 봉지에 담긴 볶은 해바라기 씨 였어요. 왠지 그리운 느낌이 들어 맥주와 함께 사서, 적당히 간이 테이블에 앉아 맥주와 함께 곁들여 먹기 시작했습니다.


먹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해바라기 씨라는 게 꽤나 먹기 번거롭습니다. 먼저 씨를 껍질에 둘러쌓인 채로 입에 반쯤 집어넣고는 따닥하는 소리가 작게 들릴 정도로 살짝 깨물어 껍질을 벗겨내고 안에 들어있는 쌀알만큼 자그마한 씨앗을 마침내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맛은 보통 견과류가 그렇듯 살짝 고소하고 담백합니다. 약간 싱거운 느낌이 들면, 다행스럽게도 껍질에 약간 짭조름한 소금기가 있어서 껍질을 벗겨내며 입 안에서 조금 오물거리면 됩니다. 그리고 뱉어내야지요. 당연히.


어쨌든, 이건 상당히 귀찮은 일이라, "겨우 이런 작은 걸 먹자고 껍질을 일일이 벗겨야 한단 말이야?"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됩니다. 이건 뭐──, 먹어서 섭취하는 칼로리보다 먹기위해 소비하는 칼로리가 더 많다고 생각될 정도로 손해보는 것 같거든요. 진짜로.(어라, 이건 조금 괜찮을지도)


그런데 이게 또 신기한 매력이 있어서, 일단 먹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옆에 해바라기 씨앗 껍질이 모래성 만큼이나 쌓여있지요. 맛 보다는 껍질을 벗겨내 먹기까지의 일련의 과정 속에 묘한 중독성이 있습니다. 저도 한참을 먹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작 칭따오는 김이 빠져버린 채로 반 정도나 남아있었고, 해바라기 씨앗 껍질은 옆에 깜짝 놀랄 정도로 잔뜩 쌓여있었습니다. 결국 김 빠진 칭따오를 마저 마시고는 다시 씨앗을 한두 개씩 집어들고 해바라기 씨앗 껍질 벗기기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호텔에는 새벽 늦게 터벅터벅 들어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아──,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시작했느냐. 그건 지금도 맥주를 한 캔 따면서 문득 생각이 든건데, "아──, 다시는 맥주를 마실 때 해바라기 씨는 안주로 곁들여서는 절대로 안돼" 라고, 굉장히 선명하게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귀찮은 해바라기 씨와 함께 김 빠진 칭따오를 비우던 그 날 새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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