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털을 잔뜩 가지고 있는 꿈. 머리털이 양쪽 눈을 덮고도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남을 만큼이나 자란 상태로, 발끝까지 털의 감촉이 느껴졌다. 손가락 끝에는 아무런 감각도 없이, 어딘가에 닿기도 전부터 털이 이쪽 저쪽으로 구부러지는 느낌만 가득했다. 눈 앞을 촘촘히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하게 달빛이 보이는 걸로 봐서는 아직은 새벽. 손을 들어올려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겨보려고 해봤지만 이리 저리 털이 헝클어지기만 할 뿐, 금방 가라앉아 버렸다. 아아──, 이래서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 온 몸의 어디까지 얼마만한 길이의 털이 어느정도로 촘촘하게 덮여있는 건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침이 밝아오기 전에 당장 이 털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건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민첩하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만큼이나 자라버린 털은 무게도 엄청났다. 세포 하나 하나에 털이 하나씩 연결되어있는 것 같아, 어딘가의 털이 구부러질 때마다 그 탄성에 의한 반발력이 지나치게 섬세할 정도로 느껴졌다. 그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덥다든지, 춥다든지, 폐쇄된 방에 새벽 내내 갇혀 있던 공기가 퀴퀴하다든지, 심지어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도 들리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신경이 각각의 털 한 가닥으로부터 전해지는 통각과 압각 정보를 뇌에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의 굉장한 털의 숫자였다. 감각의 전달을 담당하는 신경에 엄청난 과부하가 걸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방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서려고 하다가 다시금 침대에 주저 앉아 버렸다. 바닥이 굉장히 미끄럽다──,라는 잠깐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발바닥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무거운 몸을 일으켜, 한 걸음 한 걸음 세면실 방향으로 주변을 더듬거리며 향했다.
마침내 거울 앞에 서서,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인 셰이빙크림을 온 몸에 쩍쩍 바르고 새하얀 거품을 잔뜩 내서 수동 면도기를 슥슥 문질렀다.
그 와중에 자동 면도기는 새벽에 시끄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우습지만, 털을 깎아낼 수 있는 면도기를 손에 쥔 순간부터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먼저 왼쪽 어깨의 털부터 시작해 온 몸의 털을 조금씩 조금씩 차분히 제거해 나갔다. 앙증맞은 키위의 껍질을 한 가닥씩 벗겨내듯이, 꼼꼼하고 조심스럽게 피부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마지막으로 앞머리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서걱서걱 잘라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엉성하고 이상했지만 미적인 부분까지 생각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충분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이리저리 몸 구석 구석을 살펴보며 이 정도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볼 수 있었다. 아아──, 당황스럽게도 처음 시작했던 어깨 끝에서,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빗장뼈 끝자락에서 이미 확연하게 한 층 두터워진 털이 하나 둘 조금씩 눈에 보이는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불도 켜지 않은 채로 세면실에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세면실이 조금 밝아진 기분이 들어 창문 쪽을 바라보니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안방이 있는 쪽에서는 덜컼 하며 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꿈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