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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에 대하여

by 겨울색하늘

바야흐로 가을.

건조한 날씨에 피부도 마른 나무껍질처럼 쩍쩍 갈라지기 시작하고 있는 요즘. 어느덧 바람은 카디건을 걸치지 않으면 춥다고 느껴질 정도로 선선해져 있었다. 오랜만에 아침 공기가 너무 상쾌해서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전에 이사 준비가 한창인 선배로부터 처치곤란이라던 로드바이크를 하나 받아왔는데, 아직 바퀴에는 바람이 빠진 채로 축 늘어져 있어, 조만간 녹을 닦아내고 기름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날렵해 보이는 흰색 바이크의 바퀴에 바람을 넣고 아침 공기를 가르며 회사까지 신나게 달렸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사이로 자전거에 오르며 틀어두었던 라디오가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어제 새벽에 깜빡 잠들어버려 끝까지 듣지 못했던 부분부터, 중간 중간에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새벽 라디오는 항상 녹음을 해두는 탓에, 듣다가 깜빡 잠들어버리면, 종종 이런 식으로 출근길에 지난 새벽의 속삭임을 듣곤 한다. 아침 햇살아래 지난밤의 달빛 이야기를 듣는 기분은 마치 뭐랄까, 마라톤의 결승선에서 출발선으로의 역행을 하는 것 같다고 할까, 실감이 없는 건 둘째치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든다.

두 번째 신호등 앞에 멈춰섰을 때, 라디오에서 '취미에 대하여──' 라는 사연이 소개되고 있었다. 요즘 내가 안고 있는 고민거리와 비슷해서 자연스럽게 사연에 집중하다가 그만 신호를 한 번 놓쳐버리고 말았다.


취미, 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취미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건지, 그 시점을 명확히 기억할 수 있다면 스스로가 뭘 원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모름지기 취미라는 것에는 그런 무의식적인 소망이 반영되어있기 마련이니까.

그렇다고 취미라는 것에 뭔가 거창한 것을 기대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취미는 역시 미래의 모습에 대해 신중히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20년 후의 취미로부터 결정지어진 내 모습의 일부는 어떨지──, 이런 관점에서 취미를 바라보면 만만해 보이는 일이 생각처럼 많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데, 그건 마치 대학에 입학하고 전공을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중요한 일이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취미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의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는데, 실제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자리가 점점 많아질수록 취미에 대한 부분에서는 잠깐 말문이 막힌 채로, 내 취미가 뭐였는지, 어떤 취미까지 말해도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요컨대 그건 취미라는 것의 속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취미처럼 아무런 범주의 제약이 없는 상태로──, 스스로의 주관이 온전히 반영된 선택은 좀처럼 많지 않기 때문이고, 이런 취미라는 것만으로도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꽤 많은 부분을 설명 가능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건 상당히 무섭다고 생각하는 부분으로, 실제로 학창시절의 동아리 입부 지원서부터 회사의 입사지원서까지, 단 한 번도 취미 란이 없는 자기소개서는 본 적이 없다. 그건 과연 정말로 취미가 궁금한 건지, 적어내는 취미로부터 나의 어떤 모습을 유추하고자 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가볍게 지나치기가 힘들다.

생년월일이나 연락처, 주소, 혹은 전공분야 같은 건 그다지 고민할만한 항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그 사실 자체와, 혹은 다른 외적인 환경들을 조금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취미는 이야기가 다르다.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부터, 한정된 취미 란에 몇 개의 취미를 소개하는지, 가지고 있는 취미들 중 공개한 취미가 어떤 것들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은 그 사람의 가치관의 일부까지도 어느 정도 꿰뚫어볼 수 있지 않을까.(물론 나는 그 정도까진 못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막힘 없이 바쁘게 움직이던 펜이 취미라는 항목 근처에 오면 어쩔 수 없이 멈춰버린다. 조금 신중해진다고 해야 할까. 포커를 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인지 요즘은 스스로에게 취미가 뭐냐고 되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선명한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본론으로──, 취미에 대하여.

펜을 잠깐 내려두고 취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몇 가지 떠오르는 것들이 있긴 하다. 먼저 지금 틀어놓은 라디오. 나는 TV를 보는 것보다 라디오를 듣는 걸 더 선호한다. 지인들은 가끔 “지금 같은 디지털 시대 중심에 있는 사람이 라디오가 왠 말이냐”고 종종 이야기하지만, 나는 어쩐지 라디오를 듣는 것에서 마음이 더 편안해짐을 느낀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새벽에 뭔가 다른 일을 하면서 곁들여 라디오를 듣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진행자의 청아한 목소리와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반쯤 열린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새벽공기, 형광등 아래 펴놓은 책과 서류들, 수동식 기차모양의 연필깎이에 반쯤 머리를 파묻고 있는 연필과 옆에 놓인 지우개. 고개를 들면 앞에 진열되어있는 레고 블록들. 이렇게 단어만 나열해 두고 보아도 꽤나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또 새벽이라서, 주로 듣게 되는 건 공중파가 아닌 개인 라디오인데, 요즘은 1인 미디어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있어, 공중파의 그것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아니──, 오히려 유명인이 아닌, 나와 같은 일반인이 진행하는 만큼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더욱 쉽다. 시간이 불규칙한 건 조금 단점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요즘 자주 듣는 라디오의 진행자는 내 또래의 직장인인 것 같은데, 내가 안고 있는 고민거리와 비슷한 주제로 진행되는 라디오가 새벽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또 다른 취미로는 뭐 독서나 글쓰기, 게임, 전시회나 연주회를 즐긴다는 것 정도가 있는데──, 독서나 글쓰기 같은 경우에는 시작하게 된 계기가 다른 취미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할까. 좋아서 시작한 게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시작한 이후로 지금은 어느 정도 즐기게 되는 경지에 오른 것이니 이건 어쩌면 취미라기보다는 습관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처음 이야기 했던대로──, 이런 취미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20년 후의 어떤 기대치를 가지고 있는지. 라디오 듣기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으니 마저 이야기하자면 요컨대 그 즈음에는 듣는 것으로만 그치지는 않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 독서를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건 그저 ‘라디오를 직접 진행한다’ 라는 모습이 아니라, ‘나로부터의 이야기가 몇 명까지 닿을 수 있을까’의 일환으로,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즉, 개인의 플랫폼을 위한 포석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기왕이면 즐거운 방향으로 준비하고 있다.


언젠가 퇴근하고 (이제는 아지트가 되어버린)자주 가는 펍에 모여 취미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취미를 두 분류로 나누어──, 공개용과 비공개용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씁쓸한 이야기. 공개할 수 없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재미로만 빠져든 취미에 남은 것이 재미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공개해버리면 자기 자신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쓸데없는 편견을 심어줄지도 모르는 점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건 공개할 수 없다, 라는 표현보다는 공개하기 민망하다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것들은 취미라고 부르기에는 그다지 ‘건전한 것은 아니었다.’라는 이야기. 사실 이런 식이면 취미를 이야기할 때는 그냥 ‘공부’ 정도로 얼버무리면 가장 편할지도 모르겠지만──, 공개하기 민망한 취미에 대해서는 한 명이라도 입을 열면 다 같이 죽는 거라며, 협박 아닌 협박으로 이야기가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아무튼 더 이상 재미 하나만으로 어떤 취미를 갖게 되는 것은 일종의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느 순간부터 취미 선택에 있어서 유익함이라는 조건이 하나 더 붙어버린 것이다.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로 이야기하자면, 4단계에서 5단계 사이 어디쯤 될 것이다. 사실 존경의 욕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지만, 이제는 취미에 자아실현의 욕구 일부를 반영시켜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취미를 두고 요즘은 ‘어른스러운 취미’라고 부르고 있다.

오랜만의 휴일, 그간 정리하지 못했던 일들과 밀린 글쓰기를 위해 오전부터 조용한 카페를 찾았다. 얼음이 동동 떠있는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평소처럼 책을 읽고, 가볍게 감상을 적고, 그간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나면 어느새 저녁이 되어버린다.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열리는 날이면, 가끔씩 천체관측 동호회 사람들과 각자의 망원경을 짊어지고 별을 보러 떠나기도 하고, 커다란 화면 앞에 모여 앉아 친구들과 게임을 즐기기도 한다.

여전히 이런 일상에서, 아직 무언가를 착실히 쌓아 올리고 있다는 느낌은 없다. 자각하지 못한 것 뿐일지도 모르지만 역시 취미라는 건 그런 게 아닐까. 그저 이렇게 일상처럼 지나고 보면 일기처럼 한 편의 완성된 이야기가 만들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것. 적어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은, 단순히 재미있다는 것만으로는 흔들릴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일단 안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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