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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색하늘 Sep 28. 2022

여느 때와 같은 일상 #7.

  가로수가 가지만 앙상하게 남게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도보 위는 알록달록 화려해졌다. 걷는 내내 바스락거리는 건조한 소리와 살랑이는 바람에도 한두 장씩 은행잎을 날려보내는 은행나무. 담장 위에서 폴짝폴짝 방정맞게 뛰다가 미끄러질 뻔한 까치.

  꽃 한 송이 없는 매마른 가을길이지만 나는 이런 분위기의 길을 좋아한다. 음, 구체적으로 어떤 분위기냐고 하면, V.S.프리쳇이 말했던 단편소설에 대한 묘사가 떠오르는데, '지나가며 곁눈질로 얼핏 본 무엇' 과 같은 길이라는 걸까. 그다지 특별한 감상 없이 멍하니 걸어도 가을을 실감할 수 있는 길. 뭐, 날씨는 이제 겨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만.


  주말 새벽에는 일찍 눈이 뜨여, 다시 침대로 돌아가 잠들면 늦게까지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 적적한 새벽 거리를 산책하던 날. 오랜만의 휴식인데 주말 하루 쯤은 늦잠도 괜찮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평소 출근도 그다지 일찍 하는 편이 아니라 주말까지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시계를 보니 네시 반쯤 시침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직 해뜨기 전의 어두운 새벽으로 고요한 산책길을 따라 조금 걷다보니 가로등이 하나 둘 씩 꺼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로 흐릿한 달빛 밖에 남지 않아서, 아마도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새벽스러운' 시간이겠지, 생각했다.

  음악을 들으며 상쾌한 새벽 공기 사이로 걷다가 근처 편의점에서 래핑스컬 화이트 에일과 칼스버그 캔, 그리고 아몬드와 건블루베리를 사서 집으로 들어왔다.


  상쾌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아침뉴스를 보면서 블라인드를 걷어냈는데, 얼마 후에 해가 떠오르는 것 같더니 곧바로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해 이윽고 빗방울을 하나 둘 씩 흘려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아아──, 기가막힌 타이밍이었'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헤어밴드를 하고 진한 허브향이 나는 마스크팩을 곱게 펼쳐 얼굴 위에 올렸다. 적당하게 팽팽히 당겨진 고무줄같은 탄력과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 그리고 상큼한 향기로 주말 내내 꽤나 행복한 기분으로 있을 수 있었다.


  월요일은 월급날이었다.

월급날은 언제나 뿌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허무한 느낌도 들어서 도대체 통장에 찍혀있는 숫자의 나열은 무엇을 위해,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가 되어 학생이라는 직업으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회사원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라는 시시한 전개의 결과이면서도, 어쨌거나 이렇게라도 그럭저럭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숫자.

아침부터 날씨가 흐려지는 것 같더니 이내 다시 맑아져서는 기껏 챙겨온 우산이 쓸모없게 되어버렸다.


  아홉시가 넘어──, 오랜만에 퇴근길 근처의 작은 서점에 들러 신간 목록을 확인하고 에세이 코너를 기웃기웃 거리며 보물찾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서너 번 반복해서 제자리를 돌다보니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 사노 요코의 첫 에세이. 어째서 처음부터 발견할 수 없었던 건지, 역시 내가 꼼꼼하지 못해서일까 싶으면서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하나 건지긴 했으니 된 건가 싶어서 바로 계산해버렸다.


  전부터 타인의 삶에 꽤나 관심이 많아서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그것도 유명하지 않은 에세이에 마음이 끌려서 몇 번이고 서점에 올 때마다 이런 기약 없는 보물찾기를 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아닌 아무나의 삶 전부는 아니고, 요컨대 '살아 있습니다'가 아니라 '살고 있습니다'를 온전히 글로써 들려줄 수 있는 타인의 삶에 대해서.


  뭐──, 처음부터 보물찾기였던 건 아니고, 거의 책을 읽지 않았던 그 때에는 모든 책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반짝반짝 빛난다고 생각했었지만,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취향이 뚜렷해져버린 어느 순간부터는 그 반짝거림이 드물게 보이거나 혹은 전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그건 달리 말해서 이제는 벗기 힘든 색안경을 쓰게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랄까.

  아아──, 역시 제멋대로인 독서 취향이 생겨버린 탓에, 폭넓은 독서라는 건 물 건너 간 것 같아서 조금은 슬픈 기분이 든다.


  슬픈 것들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뭐, 끝도 없이 나열할 자신이 있지만 역시 관두기로 했다.

  여기서 더 전개하면 나 혼자 슬픈 걸로는 멈추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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