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중 크루들의 대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는 바로! 로스터이다. 어떤 비행을 다녀왔는지, 어떤 비행이 남았는지, 이번 달 로스터의 상태는 어떤지... 매번 같은 주제인데도, 비행마다 크루들이 *다르다 보니 우리에게는 매번 아주 중요한 수다거리가 된다.
우리 항공사 크루들은 개인별로 각자 다른 스케줄을 가지고 있다. 오늘 만난 사무장님, 부사무장님을 비롯한 동료 크루들은 99퍼센트의 확률로 초면이다. 아주 간혹, 진짜 드물게 같은 크루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내 경험상 그 확률은 4년간의 비행 중 5번도 채 되지 않았다.
크루들끼리 서로의 로스터를 이야기하면, 당연히 나의 로스터도 공유를 하게 되는데, 나의 비행 목록을 듣는 크루들마다 내게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언니, 혹시 전 남친이 로스터 팀이야? 안 좋게 헤어졌어?”
장담하건대 나는 로스터 팀이 어디에서 일하는지 알지도 못하며, 그들은 나에게는 도깨비 같은 존재이다.
있다고는 들었는데, 내 눈으로 본 적은 없고, 매달 나에게 도깨비장난 같은 일을 벌이기 때문이다. 가뭄에 콩 나듯이 좋은 일도 하지만...
아무튼 지난 4년간 나의 로스터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크루들 내에서 악명 높은 비행 중 최소 2개는 매달 나를 따라다녔고, 지옥의 비행 리스트 중 안 해본 비행이 없으며, 그 취항지들을 4개 연속으로 다녀온 적도 있다. (그러고 나서 며칠 앓았다...) 게다가 *미국은 무슨 옆 동네 가듯이 한 달에 최소 한 번은 꼭 다녀왔다. 두 번 간 적도 심심치 않게 있다.
미국 비행은 우리 항공사에서 아주 힘든 비행으로 꼽히는 비행 중 하나인데, 기본적으로 매우 장거리 비행이라 (동네마다 다르지만 최소 12시간에서 최대 17시간 정도 걸린다.) 비행 자체도 힘들고, 다녀오면 시차로 인해 불면증으로 고생한다. 게다가 거의 항상 만석이고, 이코노미의 경우 손님 수의 60% 정도의 스페셜 밀이 실린다. 스페셜 밀의 경우, 손님이 사전에 특별 신청 한 음식이기에 반드시 올바른 손님에게 주문한 음식이 정확히 가야 한다. 스페셜 밀은 한 카트에 무더기로 실리는데. 이것을 종류와 구역별 카트에 나눠 담는 것은 승무원의 몫이다.
그렇게 고난의 이코노미 4년 비행을 끝나고, 프리미엄 크루(비즈니스/퍼스트 클래스 담당)가 되어 받은 첫 번째 로스터! 이게 웬일인가!!! 4년 만의 초대박 로스터가 나왔다. (아니다. 정정하자. 나왔었다.)
그랬었다. 초반엔 좋았었다.
진급 선물 같은 3월의 로스터를 받아 들고는 나는 너무 행복했다. 다시 신입으로 돌아간 나를 위한 배려인가 싶을 정도로 차근차근 경험을 쌓으면서 적응할 수 있는 적당한 난이도의 비행들로 채워진 로스터와 심지어 비딩 한 비행도 나와서 너무 행복했었다.
프리미엄 크루로의 견습 비행이 끝나고 나자, 슬슬 로스터 변동의 조짐이 왔다. 첫 솔로 비행이 바뀌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첫 솔로 비행을 다녀와 다음에 있을 비행을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덴마크 비행이 나왔고, 그 뒤에는 무려, 바르셀로나에서 2일을 보낼 수 있는 비행이 있었다. 나는 신나는 마음으로 룰루랄라 비행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 프리미엄 크루로는 초짜이기에, 비행에서 할 일들과 메뉴 공부도 하고, 기종별 공부도 하다가, 픽업 시간을 다시 확인하려 회사 시스템에 들어갔는데... 내 눈에 보인 로스터 변경...
두둥. 나의 행복이었던 덴마크와 바르셀로나 오프 비행은 날아가고, 갑자기 캐나다 비행이 들어와 있었다. 화가 났다. 덴마크랑 바르셀로나에서 뭐 할지 다 계획까지 세워놨는데!!! 화를 삭이며.. (삭히는 데 두 시간 걸린 건 안 비밀, 참고로 캐나다 비행도 지옥의 비행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취항지이다.) 다시 짐을 싸고 다시 공부를 했다. 비행 가는 캐나다 지역이 한겨울 날씨이기에 코트와 부츠까지 챙겨서 짐을 다 싸고, 다시 회사 시스템에 로그인을 했는데. (그냥 그런 날이 있다. 이유 없이 자꾸 회사 시스템에 로그인하고 싶은 날.) 내 눈에 또다시 보인 로스터 변경!!!
이건 또 뭔가 확인을 해보니, 캐나다는 어느새 미국 마이애미로 바뀌어있었다. 악!!!! 짐 다 싸고 공부 다했는데!!! 화를 내며 날씨를 확인해 보니, 마이애미는 27도 여름이다. 와우. 하마터면 마이애미에서 겨울 코트에 부츠 신을뻔했다. 나는 겨울옷을 빼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유럽을 뺏기고 미국을 주다니 화가 났지만, 그래도 추가 오프를 받았고, 마이애미에서는 항상 짧은 레이오버를 받았던 터라 그 유명한 마이애미 비치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 기왕 이렇게 바뀐 거 이번에는 꼭 가보리라 다짐을 하며... 그 와중에 샌들에 선글라스까지 바리바리 챙겼다. 그렇게 다시 짐을 싸고, 비행 브리핑 준비를 하고 비행기종과 메뉴 공부를 했다.
이날, 비행 준비만 3번을 했다.
오가는 길 전부 만석이라서 걱정했던 것과 달리, 너무 좋은 크루들을 만나서 정말 많이 배웠던 비행. 미국 비행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평화로운 비행이었다. (도하로 오는 길만 평화로웠다... 마이애미 가는 길 언급은 생략하는 걸로...)
덴마크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도시를 구경하려던 나의 계획은 마이애미 비치에서 바닷바람을 맞는 것으로 급변경되었지만, 이렇게 또 이야깃거리 하나 얻었구나 생각하며... 넘어간다.
하아. 다음 주에도 비딩 한 비행이 있는데 이번에는 제발 무사히 가게 해주세요.
도깨비님들. 부탁합니다.
시차 부적응으로 잠도 잘 못 잤고, 날씨도 우중충했지만, 마이애미 비치에 발자국 한번 남겨보겠다고 기를 쓰고 일어나서 나갔다. 바람이 너무너무너무 불고 추워서 금방 돌아왔다...